핵심은 비껴가는 곽승준 - 정두언 교육 개혁안

교육개혁 지휘봉 잡은 이 대통령 (연합)

한국의 교육개혁이 매번 실패하는 까닭은 매번 '입시개혁'에만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현실의 가장 큰 문제는 단연 과도한 사교육 열풍이다. 한국에서 사교육 열풍은 부동산문제와 더불어 민생경제를 위협하는 대표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학생들의 학업부담이 극심해진다는 점과 더불어. '시험만을 노린 획일적 교육'이라는 면에서도 문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사교육 열풍의 근본적 원인은 단지 몇몇 대학의 입시제도 때문이 아니다. 소수의 명문대학에 가야만 한다는 목표가 바뀌지 않는 이상 과도한 경쟁은 멈출 수 없다. 이러한 학벌구조를 가만두고 입시개혁에만 치중하는 것은 결국 입시 수단의 '다양화'에 지나지 않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교육 '목표의 다양화'다. 

'곽승준-정두언' 개혁안도 전혀 다르지 않다. 문제의 핵심을 전혀 관통하지 못하는 대책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된 내용을 살펴보자면 △ 밤 10시 이후 학원 교습 금지 △ 고교 입시 절대평가 전환 △ 외고 입시 내신 폐지 △ 외고 입시 학교장 추천제 폐지 △ 문,이과, 예체능 계열별로 대학 전공에 상관없는 과목의 내신 반영 및 수능 과목 제외 △ 방과 후 학교의 위탁경영 강화 △ 불법과외 포상신고제 등이다. 이 중에서 '밤 10시 이후 학원교습 금지'는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이미 시행되고 있는 정책이다. 인수위 시절 제한 풀려고 하다가 난리가 난 정책이기도 하다. 외고 수요가 높은데, 외고 입시안 개혁은 의미가 없다. 내신과 학교장 추천제가 폐지된다면 외고 독자 시험으로 선발할 수밖에 없고, 내신 사교육보다 훨씬 더 까다로운 외고입시전문 사교육이 성황을 이룰 뿐이다. 당장의 조치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외고 인가 취소 및 외고에 유리하지 않는 쪽으로의 대입개혁이 더 낫다.

이번 개혁안은 또한 '사교육 경감'을 목표한다면서 공교육의 '입시지향'적 성격을 도리어 강화시키는 모순을 드러낸다. 내신의 기본 취지는 "성실한 학교생활"에 대한 보상이다. 절대적 지식량만을 평가하고 싶다면 내신보다는 일제고사 쪽이 더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에서 내신을 반영하게 하는 것은 지식전수 뿐 아니라 노력과 성실함과 같은 인성적 가치 역시 중요한 교육 목표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의 내신제도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한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대부분 대입에서 무력화됐지만, 그럼에도 학생들에게 과도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신의 취지가 무색해진 근본적 이유 역시 과도한 입시경쟁 때문이다.

그런데 곽승준-정두언 개혁안은 이 모순에 대해, 학벌사회를 손질하는 것이 아니라, 내신을 손질한다. 대학입시와 무관한 공부의 가치를 교육당국 스스로 평가절하함으로써,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학교 현장을 입시전쟁터로 공인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일본의 "여유교육" 실패에서 보듯, 학벌구조가 엄연한데, 입시과목을 축소해봤자 대학생 수준만 떨어지지 학업부담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10년 전에도 음악, 미술, 가정 등 입시와 무관한 시간, 국영수 자습이 벌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현실이 그러할지라도 최소한 이것이 문제라는 인식은 하고 있어야 개선의 여지가 있다. 이번 교육안이 위험한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정부는 사교육 경감을 말하면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부정한다.  

이명박 정부가 미워서 하는 짓마다 사사건건 꼬투리 잡으려는 것이 아니다. 어느 정부나 교육문제에 관해서는 골치를 썩였다. 그만큼 한국의 교육문제를 해결하는 건 쉽지 않음은 안다. 그런데 이 정부만의 심각한 문제는 사교육 경감대책을 말하면서, 그와 전혀 반대방향을 향하는 자신들의 교육관을 그대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중을 도입하면서 외고입시로 대체 사교육을 어떻게 잡겠다는 것인가. 결국 사교육 대신 눈에 보이는 사교육 업체를 잡겠다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어 보인다. 변죽만 울리는 개혁은 의도와는 다르게 상황만 더 악화시킬 수 있다. 한 때 교육개혁의 주된 쟁점은 대입제도 개선안이었다. 물론 이는 피상적 해결책이었다. 그런데 이제 피상적 해결책 중에서도 "고입제도"를 논하는 시대다. 이런 시대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봐야만 한다.

 

고1 어쩌면 마지막 그림 (한겨레 21)



by 은하 | 2009/06/25 02:24 | 우리시대 | 트랙백 | 덧글(8)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制壓(제압)하는
  노고지리가 自由(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詩人(시인)의 말은 修訂(수정)되어야 한다.

  自由(자유)를 위해서
  飛翔(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自由(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革命(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革命(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 푸른하늘을 / 김수영


이란의 푸른 하늘도 언젠가 꼭 올거다.

by 은하 | 2009/06/25 01:35 | 우리시대 | 트랙백 | 덧글(4)

노 대통령 서거

3년 전쯤. 일본어 학원 기초반을 다닐 때 회화 시간 선생님이 질문을 던졌다. "아나타, 다이토오료우가 스키데스까?"(당신 대통령을 좋아합니까?)" 그저 문형연습을 위한 회화 수업일 따름인데, 순간 멈칫했다. 그 때는 한미FTA가 추진되고 있었고, 한국사회는 양극화의 시름에 찌들어가고 있었는데. '하이'라 할까 '이에'라 할까 순간 망설였다. 풋내기의 과잉정치화된 의식도 어느정도 있었겠지. 그러나 그 때 '하이'라고 답하지 않아서 이렇게 괜스레 마음이 무거운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누가 자살했다고 한들 안 놀랄 줄 알았다. 토요일 오전이란걸 핑계삼아 늦잠자다가, 창밖의 누군가 "노무현 대통령이 죽었대"하는 소리에 깼다. 이상한 꿈을 꿨나 하고 컴퓨터를 켠 다음 지금 세 시간째 멍한 상태다. 그는 산등성이에서 추락하던 짧은 순간 후회하지 않았을까. 누가 됐건 한 사람의 죽음은 슬픈 일인데. 누구보다도 욕을 많이 먹었던 사람의 죽음을 보니까 더욱 마음이 아프다. 그의 실험은 결국 이런 결과로 끝내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었을텐데.

한국사회에 적지않은 의미를 안긴 대통령. 한편으로 많은 과제를 수행해내지 못했던 대통령. 그와 관련한 숱한 담론과 평가는 여전히 진행중인데, 이렇게 훌쩍 가 버리면, 어떡하냔말야. 그에 관한 사유는 여기서 종결되고,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부담으로 남아버렸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한 사람의 자연인을 전혀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사회가 슬픈 거다. 박종태 열사가 되었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되었건. 하지만 최소한 당신도 '사람사는 세상'을 꿈꾸었던만큼, 살아남아서 끝까지 당신이 꿈꾼 세상을 계속 지켜보기를 바라는 건 과한 기대였을까.

한국의 역대 대통령은 거의 모두 퇴임 후 영예롭지 않은 모습으로 남았다. 그 고리를 그나마 끊어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이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니, 한국 정치의 안정은 여전히 요원한 거 같다. 민주주의 2.0이라는 유쾌발랄한 실험과 통치자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공존. 이런 나라의 미래는 오롯이 살아남은 자들만의 몫이다. 죽음에 대한 미화와 죽은 자에 대한 무례 사이를 비집고, 그의 공과에 대해 더 힘든 평가를 해야한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겁지만, 충격, 착잡함, 연민 등을 딛어야 할 이유다.

사랑과 미움이 정말 극단적으로 갈렸던 사람이었다. 한국 사회의 어떤 경향이 분명 반영됐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마지막이 그 어떤 경향에 대한 경종을 울렸기만을 바랄 뿐이다. 오늘 하루는 최소한 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줄 알았으면 좋겠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서거한 노 전 대통령 출생부터 사망까지 (조선일보)

by 은하 | 2009/05/23 12:24 | 우리시대 | 트랙백(2) | 핑백(1) | 덧글(26)

요즘 글이 완전 뜸했던 이유는

글쓰고자 하는 욕망이 죄다 <교육저널>을 통해서 표출이 되서 그런 거 같아요-_-;;;;;;
...아아니 마감에 시달리다 보니 귀찮아진건가. 아아아

아무튼 교육저널 10호 무사히 나왔습니다. >_<

by 은하 | 2009/05/23 03:55 | 트랙백 | 덧글(13)

꽃보다 남자 : 이것은 트렌디 드라마가 아니다

신데렐라가 되는 법을 아는가. 여기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다. 우선 재벌 2세를 찾아가라. 부족함 없이 자라난 그의 성격은 틀림없이 안하무인. 일단 다짜고짜 뺨을 철썩 내려친다. 그리고 한 마디 쿨하게 외쳐라.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렇다면 그는 멍하게 홀린 표정으로 뺨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를 막 대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오호라 다 됐다. 그는 이제부터 당신의 노예니까.

시중에 널리 알려진 유머로, 비현실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신데렐라 드라마의 내용을 꼬집고 있다. 말 그대로 재벌 2세의 뺨을 때리고 그와 연애하는 게 유행인 시대. 그런데 이 패턴의 원조가 누군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바로 요코 카미오의 <꽃보다 남자>가 그 주인공이다. <꽃보다 남자>는 93년부터 2004년까지 장장 11년에 걸쳐 인기리에 연재되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스토리가 <꽃남>이 처음 연재될 당시로서는 혁명이었다는 것이다.

꽃보다 남자, 넌 혁명이었어.



기존 순정만화의 전형은 <캔디캔디>였다. 밝고 사랑스러운 주인공과 그를 질투하는 악녀, 그리고 한결같이 주인공에게 사랑을 베푸는 테리우스 타입의 왕자님이 주된 구도를 이뤘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는 이 모든 상식을 뒤엎어버렸다. 여자 주인공은 밝지만 좌충우돌이며, 남자는 돈만 있을 뿐 '뭐 저런 나쁜 놈이 있을까' 싶은 캐릭터다. 그리고 바로 그 소년이 이 겁없는 소녀와 엮이면서 갱생의 삶을 사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다. 그런데 이것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지금은 순정만화나 멜로드라마의 전형적 패턴으로 정착했다.

인기의 비결은 역시나 돈 앞에서도 당당한 여주인공의 당찬 모습이 소녀들의 가슴을 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이는 그만큼 돈 앞에서 당당하기 어려운 세태를 반영한다. 더욱이 성격도 난폭하고,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운 이 재벌 2세가 소녀와 사랑에 빠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성격은 사랑으로 고칠 수 있지만, 막대한 재력은 결코 노력으로 이뤄낼 수 없다. 남자주인공을 정말로 매력적이게 만드는 것. 결국은 돈이다. 장안에 화제가 되는 F4의 F는 기실 flower가 아니다. 차라리 fortune에 더 가깝다.

원작 <꽃보다 남자>가 배경으로 하는 사회 현실은 더 씁쓸하다. 90년대 초반은 일본이 장기불황에 빠지면서, 일본식 '종신고용시스템'이 붕괴되고, 신자유주의식 구조조정이 도입된 시기였다. 가난한 여주인공의 아버지가 바로 그렇게 해고된 실직자다. 그리고 한번 가난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헤어날 길이 없다. 주인공의 어머니가 딸을 억지로 명문학교에 보내는 것은 사실은 허영이 아니라, 처절한 상승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에스컬레이터식 명문학교'는 일본사회 내에서 가장 공고한 계층의 재생산 도구다. 게이오 대학, 학습원 대학 등과 같이 일류사립대에서는 부속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한 부지에서 공부하며 자동적 진학이 보장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들 사립학교 부속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만 하면, 말 그대로 입학하기만 하면 에스컬레이터처럼 신분상승이 보장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바로 이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입시경쟁이 거세다. <꽃보다 남자>의 원작자 자신도 "에스컬레이터식 학교를 다닌 사람은 뭔가 우리와 다른 것 같다"는 지인의 말에 착안하여 이 만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 바 있다. 요컨대 <꽃보다 남자>는 서민들의 삶은 불안해진 반면, 교육을 통한 계층의 분화는 더욱 공고해진 일본사회의 우울한 현실 없이는 단 한 칸도 그릴 수 없는 만화다.


<꽃남>이 히트칠 수 있는 사회, <꽃남>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는 사실 슬프다

2009년 <꽃보다 남자> 열풍이 한국에도 다시 한 번 상륙한다. 실직당한 아버지는 세탁소를 하는 영세 자영업자로 바뀌었으니, 그야말로 한국 경제구조에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에스컬레이터식 명문고는 대기업 소유의 자립형 사립고로 변신한다. 사회적으로 귀족학교를 현실의 일부로서 상상할 수 있는 분위기라는 의미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것은 주인공들의 성격과 구도뿐. "돈 이면 다 되는 줄 알아!"라던 소녀의 외침은 사실 "돈이면 다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꽃보다 남자>는 "돈이면 다 되는 사회"를 부정하는 듯하면서도, 결국 수용한다. 원작의 여주인공은 재벌학교에서도 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꿋꿋하게 살아간다. 사실은 그 외의 대안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존적 선택이란, 개인적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일 뿐. 하지만 우리네 현실은 <꽃남>의 여주인공처럼 주인공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Fortune 4 도련님들도 없다. 더 큰 문제는 재벌 2세의 인격은 사랑으로 감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지배하는 공고한 계층구조는 지속된다는 것이다. 여전히 일본의 대학부속 고등학교에도, 한국의 신화고에도 부유층 자제들이 계속 입학하여 그들만의 특권층만을 형성하는 것처럼. 그러니 <꽃남>은 단순한 꽃미남 드라마도 아니고, 트렌디 드라마도 아니다. 사탕같은 달콤함에 가볍게 넘어가기 쉽지만, 드라마 <꽃남>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이 시대의 우울한 현실과 직시해야 한다.


- <교육저널> 10호에도 실은 글입니다.

by 은하 | 2009/05/23 03:39 | 글,만화,영상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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