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06월 14일
축구 좋아하는 어느 여성주의자의 월드컵에 대처하는 자세(1)
2. 토고전에서 이겼다. 전반전은 자느라 못 보고, 후반전만 봤으니 꽤나 재밌게 본 셈.(사실 이천수 골 터지고 나서 사람들 환호하는 소리에 깼다.) 그러나 감상은 내일...은 아니고,일단 해 뜨고 나서. 소년이로 학난성, 일촌광음 불가경, 나는할일 꽤많다로구나...
3. 축구, 사실 축구를 꽤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다.
<야구가 모든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 현기증나는 턴 게임이라면, 축구는 경기 중단이 가장 적게 일어나는 리얼타임 게임이다. 야구가 섬세하다면, 축구는 야생이다. 야구는 경기의 기본 룰을 설명하는 데만 삼십분이 걸리는데, 축구에서 삼분 넘게 설명이 필요한 규칙은 오프사이드 룰 밖에 없다. 야구가 지정석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보는 게임이라면, 축구는 철조망에 달라붙어서 맥주캔을 던지며 보는 게임이다. 야구에서 신체 접촉이 허용되는 유일한 공간은 홈베이스인 반면, 축구에서 신체접촉이 금지되는 공간은 없다. 아, 물론 관중석 포함해서 말이다. 야구는 구기종목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도구를 사용하지만, 축구는 손도 아니고 발로 한다.>(불펌-_- 죄송. 나름 베이징 원인의 복수입니다 ㅋㅋ)
...라는 글을 다른데서 봤는데 그럼에도 역시 난 리얼타임 야생스포츠 취향이다. 문제는 보는 게 아니라 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관람스포츠는 일체 관심이 없으니 원...ㅡㅡ
중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 중 민지란 녀석이 있었다.(민지란 이름은 여자 이름 중에 정말 많다 -_-/어쨌든 민지란 이름으로 우리반 만지와 구분하도록 하자) 동창들은 그 녀석을 이 두 키워드로 기억한다. 1. 공부를 무지 잘 했음. 2. 축구. 1번보다 2번이 셀러브리티로서의 가치를 높여준다. 정말로 그녀의 운동신경은 대단했다. 적어도 중3때까지만 해도, 남자애들 틈에서 축구를 해도 체력적으로 밀리지 않았다.(오히려 보통 수준의 남학생들은 그녀에게 밀렸을 것이다.) 참 부러웠다. 그러나 이 녀석의 대단한 점은 사실 그 운동신경이 아니라 세간의 시선을 극복하는 '뻔뻔함'에 있을 것이다.이 녀석은 나에게 꽤나 여러가지 회한(?)을 품게 한 존재였다. 이거 공포영화랑 고교학원물에 많이 나오는 설정인데, 중학교 때 맨날 전교1등만 하는 녀석이 얘였다면, 비운(?)의 만년 2등이 나였다. 축구도 꼭 그랬다. 나도 어릴 때, 사회화가 덜 되고 남의 눈을 덜 의식하던 시절, 동생(男) 친구들하고 맨날 축구하고 같이 놀았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 '쟤 여자애가 축구한다'는 소리를 의식하게 되었고, 슬프게도 체력도 점차 따라주지 않았다. 같이 축구하던 녀석들은 나를 '동등하게 같이 경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구하는 신기한 여자애'로 끼워주는 게 짜증났다. 그래서 어느 순간 확 그만두었다.
...원피스 1권 조로와 쿠이나 에피소드를 볼 때, 내 얘기 같아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_-
어쨌거나 나는 그랬는데, 이 녀석은 여전히 축구를 하고 있다! 사실 체력과 운동신경은 지속적으로 운동하다보면 조금씩 단련되는 거라, 중학교 1학년 그 시절 얘와 나의 운동신경 차이는, 선천적 문제라기보다는 축구를 지속했느냐 안 했느냐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나는 결국은 외부 시선에 굴복했으면서도 체력과 운동신경의 문제로 나를 정당화했고 민지를 부러워했고 그래서 미워하기도 했다.
가장 미웠던 것은 아마 이거였을 것이다. 나도 축구를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민지를 통해서 '축구 (하는 걸)좋아하는 여자애도 있네. 신기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으로서 내 존재를 부정당한 느낌, 그러나 인정받는 이 녀석. 나로서는 따라가지 못했던 용기와 뻔뻔함. 축구를 좋아하면 더 비참해 질 거 같아서 그 이후로부터 축구와 '안녕'했다. 마음 속으로도, 보는 것 조차 (이래서 관람스포츠 싫어할지도)
4. 어린 날의 후회 혹은 어리석음
대학생이 되니 할 수 있는 것 하나, 이 시절 나에 대해 해석하기. 이런 남성중심적 스포츠 이데올로기와 그 속에서 타자화되는 여성-_-(왜 이렇게 학술적 언어는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뭔가 화석화 되는걸까) 둘. 어린 날의 행각에 대한 아쉬움과 부끄러움 느끼기. 그래 사실 후자가 있어서 더 기억에 남는 것일 게다.
생각해보니 이런 식으로 축구 좋아하던 여자애가 나와 그녀 뿐이었을까. 찾아보면 더 많지 않았을까.
왜 나는 그녀더러 같이 축구하자고 말을 못했을까. 그녀는 축구 좋아하는 여학생 친구들을 찾기 보다 그냥 남자애들과 같이 축구하는 방식을 택했을까. 지금 드는 이 생각을 그 당시에는 전혀 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앗 혹시 나의 사적인 컴플렉스 때문에?-_-;;;)
피구와 발야구는 허용되었지만 여학생들에게 축구는 허용되지 않았던 그 시절. 여학생에게 축구를 허하라! 라고 말할 용기도, 인식은 나와 그녀에게 모두 없었음이 분명하다. 나는 아예 축구와 결별했고, 그녀는 개인적으로 셀러브리티가 되어 참가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게 너무나 아쉽다. 당시 둘 다 14세였다는 걸로 변명하는 수 밖에. 나는 가끔 팩차기로 그 시절 회한을 달랠 뿐이다(...)
5. 수미상관 구조로 돌아가자면 일을 하나 또 벌였다.-_-;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과 월드컵 이야기. 우리 반 여성주의 학회와 용화반 여성주의 학회랑 연합해서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월드컵을 비판하는 문화자보를 쓸 예정이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이라는 나의 입장이 반영된 시각이 꽤나 드러날 것이다.
그 자보를 기획하는 직접적 이유는 '여성'과 '축구-월드컵'이 불화할 수 밖에 없는 이 시대를 비판하려는 것이지만...아마 나의 마음 속 어딘가에, 여성과 축구 사이의 불화를 다른 여성과의 연대를 통해 극복해 내지 못했던 14세 그 시절에 대한 후회 혹은 마음의 짐 같은 게 자리잡고 있어서일 것이다. 축구를 소재로 했을 뿐, 조금은 다른 문제의식이지만 그 시절 문제를 회피했던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대응하고 싶었다.
6. 전화기 주소록 날아갔다. 흥진중 9회 졸업생, 안양고 19기 출신 김민지 혹시나 글 보면 연락해라. 싸이에 85년생 김민지 너무 많다.(블로그를 다모임으로 쓰다니-_-)
<여기서부터는 반 컴티에 올린 것>
1. 음 일단 토고전 이겼군요. 와~
2. 그러나 이겼다고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는 월드컵입니다. 징글맞은 언론의 월드컵 띄우기와 상업주의는 하다못해 김풍 폐인가족에서조차 다루고 있고(핀트는 다르지만-_-), 자발적 거리응원도 거대 자본이 동원하는 거리공연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월드컵으로 잔뜩 고양된(혹은 조작된) 국가주의적 열기(혹은 광기?)가 어느 방향으로 튈런지도 우려스러운 부분이지요. 방송과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월드컵에 관심없는 사람에게 필요 이상의 관심과 열기를 강요한다는 것도 유쾌하지 않습니다.
3. 이러한 비판중에 여성주의적 입장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독일 정부에서, 월드컵 기간을 맞이하여 동유럽에서 성매매 여성을 3천명이나 수입-_-했다는 보도는, 여성이 왜 월드컵에 마냥 즐거워만 할 수 없는 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우리의 얼광은 스스로를 억압하는 또 다른 굴레가 되고 있죠. 방송사들은 (남성의 입장에서)근사한 화면을 잡아내기 위해, 거리응원 앞 줄에 노출 심한 미녀들만을 배치하고 있다고 하지요. 월드컵과 섹시화보가 대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마는 기획사와 여성 연예인들은 월드컵 응원 섹시화보라는 말도 안 되는 것을 찍어대면서 한 몫 잡으려고 합니다. 그냥 큰 판 벌렸을 때 돈 많이 벌어보자는 걸 이런식으로 포장한단 말이죠. 과열된 월드컵 열기는 이러한 사안에 대해 비판의식을 승리의 기쁨에 묻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월드컵 비판하기는 쉽지 않아요.
이런 것들을 볼 때 여성주의적 시각의 월드컵 비판은, 월드컵에 대한 여러 비판중 하나가 아니라, 핵심인지도 모릅니다. 인간보다 자본과 과열된 국가주의가 우선하는 월드컵!
네. 그리고 여성은 월드컵을 남성과 동등하게 즐길 수 없습니다. 자신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월드컵이 이루어질만한 거대한 시스템 (국민국가, FIFA, 거대자본, 각종 문화적 요소)에서 여성은 타자화되고 있죠.
4. 그런데 여성주의 내에서도 미묘하게 균열이 있습니다. 우선, 여성들이 축구에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축구에 대해서 전혀 관심없는데 주변 사람들이 계속 월드컵 얘기만 하고, 축구 얘기만 하면서 오는 소외감, 박탈감이죠. 전국이 월드컵에 미친 상태에서 이런 소수자의 문제는 묻히기 쉽습니다.(오히려 유럽 여성들이 이 부분을 적극 제기하고 있죠)
하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들도 월드컵에는 고민이 많을 것입니다. 오히려 축구를 좋아하기에 더 그럴수도 있죠. 월드컵을 신나게 즐기고 싶어도, 조금만 신경을 쓰면 주변에 여성주의로서 불편한 거 투성이입니다. 아까도 말한 성매매, 월드컵 대목 틈탄 여성의 몸 상품화, 그리고 여성들은 언제나 '응원자'로서의 역할만 요구받지, 진짜 운동장에 뛰면서 축구를 즐길 수 없는 현실까지요. 동등한 참여자가 되고 싶은데, 타자임을 강요당한다는 것도 꽤나 괴로울 거에요.
이 두 가지 입장은 모두 중요하고 무시될 수 없겠죠.
5. 거기다 암초 하나 더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대학 내 여성운동'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입니다. 네이버 리플 보면 이런 글 엄청나게 올라옵니다. '솔직히 우리나라 페미들은 너무하지 않냐? 월드컵 얘기도 못 하게 하고, 과방 달력에 축구 일정도 못 쓰게 하고.' 어느 정도 그렇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면서 '대학내 페미들 썩어빠졌다'라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대체 '페미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월드컵을 대하는 여성들의 고민을 모르니, '맹목적이고 생뚱맞다'라는 생각이 들 뿐이지요. 그러다 보니, 여성주의자들도 선명하고 확실하게 문제를 공론화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방법을 택하게 되는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저번 세미나에서도 나왔지만 남성 입장에서, 여성의 내면적 심리나 정치적 소외감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어느 정도는 당연하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전제 위에서 소통을 시도하려기 보다, 여성주의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에 편승해 그냥 비판만 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러기에 여성주의자들로서 더욱 월드컵에 딴지 걸기 어려워지지요.
6. 그래서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역동반 여성주의 학회 바램 + 용화반 여성주의 학회 아수라 연합자보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랑 아수라짱이랑 이런저런 얘기하다 생각하게 되었구요, 문자와 엠에센으로 몇몇 학회원들에게 연락하여 동의를 얻었습니다. 연락 못 받은 사람 죄송해요. 일단 저의 문자비 부담이 크다는 것도 있구요(...) 여성주의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 문제는 여성들의 경험에서 느끼는 문제의식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에 일단 여학우들에게만 물어봤습니다.
또 왜 단독자보가 아니고 연합자보냐구요? 일단 상황도 상황이지만(...) 우리 반 학회 혼자서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단위, 인원이 참여한다는 게 발언의 힘이 더 큽니다. 또한 다른 반 여성주의 학회원들과 토론을 통해서, 그 동안 바램에서 가지지 못한 시각과 접할 수도 있고 새로운 자극을 얻을 수도 있지요. (아수라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역동반 학생회 이름으로 제안할 수도 있었지만, '여성주의'의 문제를 분명하게 부각시키려면 두 반의 여성주의 학회 연대 쪽이 나을거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7. 조금 더 일찍 시작했으면 좋았겠다마는 역시 시험의 압박은 무시무시하니 어쩔 수 없었구요..ㅠㅠ 오히려 토고전 승리로 월드컵에 대한 기대가 가장 높을 이 시기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7동에는 방학에도 계절학기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자보를 위해서는 한 차례 토론회 정도 가질 예정이에요. 이번 주 안이었으면 좋겠지만 용화반 아수라짱이 안 된다고 하는데 조정을 해 봐야 겠어요. 토론이야 남녀불문, 학번불문, 전공불문(...) 환영입니다. 날짜 의견 주세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7동 라운지에 붙일 자보를 써 봐야겠죠.
축구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월드컵에 대처하는 자세...가 '저의' 핀트이지만 그것은 만나서 토론을 통해 조정될 것입니다.
어쨌건, 여성주의 학회가 단순히 반 내에서 문제의식의 공론화와 토론에 그치지 않고, 더 넓은 공간에서의 적극적인 실천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흐흐흐 화이팅^-^/
# by 은하 | 2006/06/14 03:45 | 희망의 상상력 | 트랙백 | 덧글(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