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07월 09일
시장은 낭비적이다?
찜질방 시장과, 로스쿨 유치 전쟁을 보며 든 생각
맑스는 자본주의에 낭비가 생긴다고 보았다. 흔히 말하는 과잉생산이 그 단적인 증거다. 이윤을 많이 내려면 많이 생산하려는 욕구와, 적게 고용하는 욕구를 동시에 갖게 된다. 그런데 적게 고용하면 회사 자체로는 이익일지 몰라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구매력이 떨어져서 소비를 감소하게 만든다. 결국 이 두 욕구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 구매능력에 비해 많은 걸 생산해내는 과잉생산의 상태가 오고 주기적으로 공황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참고로 맑스는 자본주의가 공황 때문에 망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한다. 오히려 공황의 파괴적 힘이 자본주의를 재생시킨다. 그러나 공황 과정에서 겪는 극심한 파괴와 복구비용을 생각하면 역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공황이 안 오더라도 '낭비'라고 생각디는 것들은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바로 밑에 포스팅을 한, 로스쿨 유치 문제도 내가 볼 때는 심각한 낭비다. 결국은 살아남을 10 여 개 학교를 위해서 나머지 학교는 헛돈을 퍼부을 수 밖에 없다. 주류 경제학에서 말하는 완전균형시장도 완전균형시장이 이루어지기까지의 신규 업체의 진입과 퇴출 과정에 들이는 자원의 낭비는 애써 외면한다. 물론 개인이 창업하고 파산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개인의 책임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묻지마 소창업으로 내몰리는 사회에서는 분명 사회
적 책임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가령 목욕탕과 같이 '물'이라는 공공재를 사용하는 산업의 경우 진짜 심각한 사회적 낭비다. 찜질방 업체들이 번성했다가 결국 몇몇 찜질방들이 문을 닫고, 현재 대략 균형상태를 이루는 산본의 찜질방 업계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나는 값싸게 이용할 수 있으니 좋기야 하지만 그 동안 낭비된 아까운 물은 어찌할 것인가. 가뜩이나 물부족 시대에. 이거 지구적인 죄악 아닐까도 싶다 ㅡㅡ;; -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낭비긴 하다.
맑스가 이 낭비가 심하고 비효율적인(!)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계획경제를 확실히 주장한 거 같지는 않은 거 같다. 물론 계획경제와 사회주의는 다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와 주로 짝을 이루는 개념이다만, 계획경제는 시장경제와 짝을 이룬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가 다른 것도 물론이다. 자본주의-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 문제이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는 경제활동에 대한 정부의 개입 문제의 여부이다. 가령 박정희 시대 한국은 명백히 자본주의긴 하지만 완전히 시장경제였다고 하기에는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 보다는 자본주의는 자본의 증식에 시장경제가 유리할 때면 시장경제를 들고, 어느 정도의 계획경제가 유리하면 계획경제를 들고 나오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지금부터 말하는 시장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시장이다.
그러나 혁명을 일으키고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실현시킨 혁명가들은 계획경제와 사회주의 경제를 결합시켰다. 생산수단을 국유화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거대한 관료체제를 작동시켰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실험의 근원은 인간 이성에 대한 장밋빛 낙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자본주의는 확실히 낭비가 발생한다. 특히 시장경제와 짝을 이룬 경우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자본의 무한한 욕망과 미래를 알 수 없는 거친 경쟁을 계획적으로 조정할 수 있다면?! 그들은 사회모순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계산, 계획 능력을 신뢰한 것이다. 그러나 계산, 계획 능력은 심히 불완전했고 동구권 국가들에서 이따금씩 생산량 예측을 실패한 탓에 치약파동, 비누파동 등의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더구나 계획경제 하에 비대해진 관료시스템은 인민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져 결국은 붕괴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맑시스트들은 근대 서구문명의 두 가지 지점을 분명하게 타도했다. 기독교와 이성의 빛을 표방하는 자본주의. 하지만 사회철학의 이해 가르치시던 정호근 선생님은 이성으로 낭비를 관리하고 막을 수 있다고 믿은 측면은 근대 이성주의를 계승했고, 빈곤에서 해방된 인간이 과시적 소비를 추구하는 대신 평등한 삶에 대한 만족할 것이라고 믿었던 점은 기독교적인 어떤 긍정적 인간관의 영향이 보인다고 해석하셨다.(이 점은 아담 스미스와도 어떤 면에선 비슷하다) 재미있지만 또한 놀랍지는 않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지적 전통이 어디 가겠는가. 사회주의 혁명은 근대 이성의 적자,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실패는 다름 아닌 근대 이성의 실패다.
어쨌거나 현실사회주의는 몰락했다. 이것도 일종의 '이성'의 실패라고 읽을 수 있다. 어쨌거나 전 세계는 "거 봐라!"하는 양 의기양양하게, 이전보다 더욱 거센 광풍으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그 폐해는 언급하는 것이 오히려 진부하다.
그러나 맑시스트들이 던진 최초의 의문점. 자본주의와 결합한 시장경제 체제가 일으키는 "낭비"를 해결할 방도는, 승리에 도취해서인지 애써 외면하고 있다. 주류 경제학에서 '외부효과'라고 이름붙인 이 현상들은 아무리 봐도 외부 효과가 아니라 시스템 내부의 문제인 거 같다. 더 큰 문제는 시장 시스템 내부적 문제롭 발생하는 외부효과-_-중 환경문제와 같이,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가고 있다는 현실이다.
인간 이성의 실패를 겪고, 자본주의 문제점은 그대로 남아있고-아니 더 심해지고. 인류전체를 위협하는- 아니 이미 파괴하고 있는 문제들과 직면한 이 현실. 문자 그대로 End of History 라는데 슬그머니 공감이 가고 있다. 대체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무슨 감성으로 이 End에 환희에 찬 긍정적 의미를 붙였는지. 사회주의가 근대 이성의 자식이라면 결국 동구권의 몰락은 일종의 존속살해인 셈이다. 이 존속살해에 애도하기는켜녕 승리라고 착각하며 환호했던 바보들의 무리더러 어찌 세상이 나아지게 기대하는 것은 역시나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끝없는 낭비가 현재 끊임없이 생산기반은 물론 삶의 기반까지 파먹어가는 현실을 볼 때, 어쩌면 존속살해를 기뻐하는 동생은 자살을 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다...-_-;;;
# by 은하 | 2007/07/09 17:03 | 생각 | 트랙백 | 덧글(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