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4월 19일
한국의 교육 현실에 관한 3가지 오해
부제 : 현 정권의 학교자율화정책과 고교다양화 정책이 삽질인 이유.
1.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범람한다.
출처 : http://comicmall.naver.com/webtoon.nhn?m=detail&contentId=15640&no=181&page=1
한 때, 교육부에서 입시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능을 쉽게 내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수능의 변별력이 없다는 비판으로 다시 어렵게 출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표준점수제를 도입하여 난이도에 따른 점수편차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수능제도가 어떠했던 학생들이 부담이 가볍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수능은 어차피 상대평가제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점수가 아니라 등수로 대학가는데, 모두에게 쉬운 혹은 어려운 수능이란 별 의미가 없다.
최근 용자놀이로 신망이 급격히 떨어지기 전의 정글고 176회에서는 이러한 입시제도의 본질을 아주 있는 그대로 쏟아내었는데, 정작 저 회에만 유난히 '이사장 맞는 말 했네', '이사장 캐공감 ㅠㅠ' 이런 류의 댓글이 많이 달렸다. 이사장의 말을 뒤집으면, 대입에 100m 달리기에 1등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기록은 상관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오히려 그러기에 끝이 안 보이는 막막한 경쟁을 해야 한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하기 위해 학교에서 할 만큼 했다고 판단되면, 동원되는 것은 바로 '남들이 안 하는 것' 즉, 사교육이다. 사교육은 이처럼 근본적으로는 입시제도의 상대평가성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사교육을 받는다. 학원장들의 주장과 달리, 아무리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지라도, 어차피 중요한 것은 나의 등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양질의 교육은 의미가 없다. 수능이 쉽건 어렵건간에 나의 등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듯이, 현재의 환경이라면 학교가 아무리 좋은 교육을 제공해주어도 등수를 높이기 위한 사교육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의 부실화가 사교육 범람을 낳는다는 진단은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다.
사교육이 범람하는 매커니즘은 따로 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사교육시장이 실제로 돌아갔던 모습을 추적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예리한 분석은 구름코끼리님이 해 주신 것이다.
잔인한 4월 - 이대로는 안 된다. (구름코끼리)
[이미 1%에 진입한 사람들이 자녀에게 더 좋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각종 사교육을 시킨다. 영어유치원, 선행학습.. → 발빠른 학원들이 부추긴다. → 미리 공부한 아이들에게 학교수업은 재미가 없다 -> 공교육을 탓한다, 일반고가 아니라 특목고에 보내야 겠다고 생각한다. → 특목고가 서울대 입시학원이 된다. → 학부모들 사이에서 특목고에 안가면 일류대 못간다는 말들이 떠돈다. → 너도나도 특목고대비 사교육에 뛰어든다 →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들도 위기감을 느껴 사교육 대열에 합류한다. → 특목고에 가보니 내신에 불리하다. → 수능을 잘보기 위해 사교육의 필요성이 더 높아진다. 일부는 자퇴하고 사교육에 올인한다. → 수능을 보고 나서는 내신 적용이 '불평등'하다고 불만이다.(내신이 불리하다는 것은 특목고 입학당시에도 알고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 대학들도 장단을 맞춘다. '뛰어난' 학생들을 뽑기 위하여 입시전형의 다변화를 추구한다. → 내신비중을 낮추고 논술, 수시 등 다른 전형을 개발한다. → 논술학원, 경시대회 학원이 성황을 이룬다. → 사교육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커진다..............]
애초에 공교육을 무력화시킨 것은 학원가의 선행학습이었다. 이사장 말대로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려는' 욕망은 예습을 넘어서 비정상적인 선행학습을 부추겼다. 초보강사인 나의 경우 학교 진도보다 3주 앞서서 진도를 빼지 못했기에 지금 주6일을 들여 보충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이 3주나 앞선 학원 진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이미 한 학기 전 방학에 선행학습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창의성이나 국가의 지적 경쟁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단지 옆 짝보다 잘하기 위한 소모적 경쟁이다. 더구나 악순환까지 낳는다. 선행학습을 해 온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교사들이 의욕을 잃어 무성의한 수업을 하면 원래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학생들조차 학원을 찾아가야 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경제적 이유로 학원을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은 완벽히 낙오된다. (주1)
상위 1%안에 들어야 한다는 욕망과 경쟁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사교육 광풍은 잡을 길이 없다. 사회 전체가 상위 1%안에 진입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머지 99%의 삶이 피폐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80년대부처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임금과 삶의 자존감까지 성적순으로 배치되어가고 있다. 일류대학 출신만이 차지할 수 있는 고소득 전문직은 물론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평범한 '정규직' 일자리마저 현저히 좁아지고, '듣보잡'이라는 모욕적 칭호가 대학서열을 매기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부르짖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인 것이다. 학교제도를 어떻게 손질해도 '남들보다 더 잘 하기 위한' 경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꾸지 않는 한 답은 없는데, 사회는 반대로만 흘러간다.
2. 평준화가 공교육 부실의 주된 원인이다.
평준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 1) 비평준화가 교육의 수월성에 우리하다. 2) 학생들에게 학교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 이 두 가지 논리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수월하게 해야 하는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지, 학생들이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할 '학교'란 곳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고서는 근거가 천편일률적으로 모의고사 점수일 수는 없다.(주2)
솔직히 나는 중학교 때 명문고에 진학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우수한 학생들끼리 모여 공부를 한다는 점에 자극받고 동경하기는 했지만, 명문고 학생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느낌이 좋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시끄럽게 구는 한심한 학생들이나, 소위 말하는 '날라리' 없는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희망대로 나는 명문고에 진학하고 졸업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중학교 때 나는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데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친구로 사귀고 어울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어느 사회를 가도 인간은 다양하기 마련이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대체로 몇 가지 직업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직업과 계층이 다른 사람들끼리 허물없이 친해질 기회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드물어진다. 당연히 평준화였던 초등학교, 중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의 허물없는 이야기에서 지금도 나는 다양한 다른 삶들을 배우고 있다. 그 때에도 날라리들이 싫긴 했지만, 걔네들이 있어야 그래도 수학여행 반별 장기자랑에서 재밌게 놀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런 게 진짜 교육이 아닐까.
비교육적인 것은 명문고에 진학해서 뽐내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자아정체감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이 무렵 비평준화 지역의 학생들은 자기가 진학하는 학교를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나는 명문고니까 우수한 사람, 나는 중위권 고등학교니까 보통은 되는 사람, 나는 A고와 S고 사이의 학교에 갔으니까 A고 애들보다는 못해도 S고 애들보다는 나은 사람. 원하는 학교에 떨어진 나는 입시의 패배자. 불평등이 인간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언제 이를 겪느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평준화 이념은 단순히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니라, 단일한 계층, 성격의 학생들이 모이는 것보다, 어린 시절 보다 다양한 환경을 지닌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살아가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즉 교육은 지식의 전달 뿐 아니라 인성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학교는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수월성이라 하면 이러한 기능까지 포함해야 하는데, 그런 논쟁은 들은 적이 없다.
더욱이 평준화 체제가 반드시 교육(지식습득) 수월성의 저하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한 바로 생각해보건데 확실히 상위권 학생들 간에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비평준화 체제가 유리하다. 그러나 중위권 학교나 하위권 학교에서 성과는 어떠한지 구체적 연구결과를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효율적인 지식전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학생들의 수준편차만은 아니다. 학급당 학생 수, 교사1인당 학생 수, 학교의 시설과 투자 등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학창시절 공부에 전념하고자 해도 방해받았던 고충을 널어놓는 평준화지역 출신 우등생도 있지만, 만약의 한 반 학생 수가 20명이었으면 어땠을까. 선생님의 업무가 적어 더 학생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일선 학교에서 교육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 의사결정이 이루어 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대학의 학생선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립대가 법인화를 통해 자율성을 얻고싶은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이 교육 전반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서는 안된다. 3불정책이 한국 교육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 전반을 변화시키는 거시적인 정책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단순히 평준화와 국가개입이 지고의 악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전 교육정책의 정 반대에 서서 무조건 자율화만 내세운다고 다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것도 구름코끼리님, 잔인한 4월 - 이대로는 안 된다.
3. 학력차별은 불평등하지만 불공정하지는 않다.
명문대학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에 엄밀히 따져 명문대학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경우 NES나 그랑제꼴이 있고, 그 외 대학이 평준화 된 국가들도 분야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학교들은 있다. 게다가 이러한 나라들은 대학진학률이 40% 안짝이기 때문에 대학교육 자체가 일종의 지식 엘리트 교육이라는 암묵적 함의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국내의 모든 대학들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 계서구조를 이루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일본 정도일까. 미국의 하버드가 굉장한 명문대접을 받지만, 이를 '세계 1위의 대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세계에 한국인과 일본인밖에 없다고 한다. 이는 하버드를 각기 자국의 서울대, 도쿄대에 대입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육제도에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명문대학은 그 수가 많고 주립-사립 경쟁체제라는 점에서 한국보다 "독과점의 폐해"만큼은 덜하다. 일본조차도 역사학의 경우 도쿄대와 교토대가 양분하여 주된 학풍을 형성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정치,경제,문화예술,학문 엘리트가 거의 손에 꼽을 만한 몇몇 대학에 평중되어 있다. 최장집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기득권의 동심원 구조가 겹치면서 강력한 보수적인 기득권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작 엘리트들 간의 경쟁체제는 실종되어, 일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학문적 다양성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명문대학이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대학조차 거대 대기업이 쥐락퍼락하는 한국경제와 너무 닮아서 문제인 것이다.
또한 한국만큼 대학이 인격의 척도가 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배우자를 고를 때, 학벌을 따지는 것은 경제적 이유 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이유도 크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교양없는 졸부로 취급받는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더라도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 - 주로 학자나 교사 -은 존경해주는 풍조가 있었다. 물론 이 자체도 나름 문제이지만 최근들어 교육의 대물림이 극심해지면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경제적으로도 소외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인터넷 뉴스에서 기사내용과 무관한 대학서열놀이가 툭하면 벌어지고, '듣보잡'이라는 모욕적 칭호도 이러다가 나왔다. 그러기에 학력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예인조차 학력을 위조하는 나라다. 어차피 명문대학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에, 다수 사람들을 패자로 만들면서,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신념을 확산시키는 게 한국의 대학서열화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학력은 실력을 증빙하는 신호이며, 따라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불평등해도 불공정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은 성립할 수 없다. 한국에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단순히 '학문적 능력'이 필요한 몇몇 직종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다.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인격적인 차별대우가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가능한 직종들의 처지는 너무나 열악하다. 일류대학 나오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간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에 대한 비판과 시정노력도 없이 학력불평등을 수용하라는 것은 인간평등과 존엄성의 이념을 포기하라는 의미와 다름없다.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 시절 "누구나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가는 나라"를 꿈꾸었지만, 그 역시 대학이 인격의 척도가 되는 환경에서 벌어나는 발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더 바람직한 것은 "누구나 대학을 가지 않아도 자기 일 열심히 하면 먹고 살고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꿈같은 세계가 결코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학벌사회인 일본의 경우에도 3대가 라면집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름 존경해준다고 한다.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는 공장 숙련공들의 지위가 높다. 우리나라 울산현대 노동자들은 (노동강도가 어떻건 간에) 경제적 지위는 나름 높을지언정 '사회적'지위는 비교할 수 없다. 노르웨이의 버스기사들은 사무직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일하며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임금불평등 체계를 개선하고, 큰 소득을 벌지 않아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복지제도가 이러한 일의 기반이다. 우리는 못 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안 하는 것이다.
주1) 이런 현상이 가장 극심하게 자행되는 과목이 '영어'다. 영어의 경우 사교육이 상식처럼 되어 있고, 교사들도 자연히 사교육을 이미 받은 것을 전제로 하고 가르친다. 계층에 대한 과목 성적차가 가장 큰 과목도 영어다. 이 시스템에서 영어몰입교육은 그야말로 불에다 기름붓는 격이다. 효과도 문제일 뿐더러, 영어몰입교육에서 남들보다 더 잘 하기 위해 과외를 하는 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
주2) 근데 이 조차 사실 정확한 자료를 본 기억이 없다. 막연히 비평준화가 교육수월성에 좋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확실한 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좋은 듯 하다. 그러나 상위권만 국민이 아니잖아.
1. 공교육이 부실해서 사교육이 범람한다.

한 때, 교육부에서 입시부담을 줄이기 위해 수능을 쉽게 내겠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수능의 변별력이 없다는 비판으로 다시 어렵게 출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표준점수제를 도입하여 난이도에 따른 점수편차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수능제도가 어떠했던 학생들이 부담이 가볍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유는 수능은 어차피 상대평가제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점수가 아니라 등수로 대학가는데, 모두에게 쉬운 혹은 어려운 수능이란 별 의미가 없다.
최근 용자놀이로 신망이 급격히 떨어지기 전의 정글고 176회에서는 이러한 입시제도의 본질을 아주 있는 그대로 쏟아내었는데, 정작 저 회에만 유난히 '이사장 맞는 말 했네', '이사장 캐공감 ㅠㅠ' 이런 류의 댓글이 많이 달렸다. 이사장의 말을 뒤집으면, 대입에 100m 달리기에 1등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기록은 상관없는 것처럼,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 오히려 그러기에 끝이 안 보이는 막막한 경쟁을 해야 한다.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하기 위해 학교에서 할 만큼 했다고 판단되면, 동원되는 것은 바로 '남들이 안 하는 것' 즉, 사교육이다. 사교육은 이처럼 근본적으로는 입시제도의 상대평가성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우지 않는 것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남들보다 더 잘하려고 사교육을 받는다. 학원장들의 주장과 달리, 아무리 학교에서 양질의 교육을 제공할지라도, 어차피 중요한 것은 나의 등수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양질의 교육은 의미가 없다. 수능이 쉽건 어렵건간에 나의 등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듯이, 현재의 환경이라면 학교가 아무리 좋은 교육을 제공해주어도 등수를 높이기 위한 사교육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의 부실화가 사교육 범람을 낳는다는 진단은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다.
사교육이 범람하는 매커니즘은 따로 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사교육시장이 실제로 돌아갔던 모습을 추적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의 예리한 분석은 구름코끼리님이 해 주신 것이다.
잔인한 4월 - 이대로는 안 된다. (구름코끼리)
[이미 1%에 진입한 사람들이 자녀에게 더 좋은 삶을 물려주기 위해 각종 사교육을 시킨다. 영어유치원, 선행학습.. → 발빠른 학원들이 부추긴다. → 미리 공부한 아이들에게 학교수업은 재미가 없다 -> 공교육을 탓한다, 일반고가 아니라 특목고에 보내야 겠다고 생각한다. → 특목고가 서울대 입시학원이 된다. → 학부모들 사이에서 특목고에 안가면 일류대 못간다는 말들이 떠돈다. → 너도나도 특목고대비 사교육에 뛰어든다 → 일반고에 다니는 아이들의 부모들도 위기감을 느껴 사교육 대열에 합류한다. → 특목고에 가보니 내신에 불리하다. → 수능을 잘보기 위해 사교육의 필요성이 더 높아진다. 일부는 자퇴하고 사교육에 올인한다. → 수능을 보고 나서는 내신 적용이 '불평등'하다고 불만이다.(내신이 불리하다는 것은 특목고 입학당시에도 알고 있었던 것임에도 불구하고) → 대학들도 장단을 맞춘다. '뛰어난' 학생들을 뽑기 위하여 입시전형의 다변화를 추구한다. → 내신비중을 낮추고 논술, 수시 등 다른 전형을 개발한다. → 논술학원, 경시대회 학원이 성황을 이룬다. → 사교육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커진다..............]
애초에 공교육을 무력화시킨 것은 학원가의 선행학습이었다. 이사장 말대로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하려는' 욕망은 예습을 넘어서 비정상적인 선행학습을 부추겼다. 초보강사인 나의 경우 학교 진도보다 3주 앞서서 진도를 빼지 못했기에 지금 주6일을 들여 보충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이 3주나 앞선 학원 진도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이미 한 학기 전 방학에 선행학습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창의성이나 국가의 지적 경쟁력과는 아무 상관도 없이 단지 옆 짝보다 잘하기 위한 소모적 경쟁이다. 더구나 악순환까지 낳는다. 선행학습을 해 온 학생들에게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교사들이 의욕을 잃어 무성의한 수업을 하면 원래 학원을 다니지 않았던 학생들조차 학원을 찾아가야 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경제적 이유로 학원을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은 완벽히 낙오된다. (주1)
상위 1%안에 들어야 한다는 욕망과 경쟁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사교육 광풍은 잡을 길이 없다. 사회 전체가 상위 1%안에 진입하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경쟁한다는 것은, 그만큼 나머지 99%의 삶이 피폐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80년대부처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사회는 임금과 삶의 자존감까지 성적순으로 배치되어가고 있다. 일류대학 출신만이 차지할 수 있는 고소득 전문직은 물론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평범한 '정규직' 일자리마저 현저히 좁아지고, '듣보잡'이라는 모욕적 칭호가 대학서열을 매기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공교육 정상화를 부르짖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인 것이다. 학교제도를 어떻게 손질해도 '남들보다 더 잘 하기 위한' 경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사회 전반의 흐름을 바꾸지 않는 한 답은 없는데, 사회는 반대로만 흘러간다.
2. 평준화가 공교육 부실의 주된 원인이다.
평준화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 1) 비평준화가 교육의 수월성에 우리하다. 2) 학생들에게 학교선택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 - 이 두 가지 논리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수월하게 해야 하는 '교육'의 의미는 무엇인지, 학생들이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할 '학교'란 곳은 무엇을 하는 공간인지 깊이 생각해 보았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렇지 않고서는 근거가 천편일률적으로 모의고사 점수일 수는 없다.(주2)
솔직히 나는 중학교 때 명문고에 진학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우수한 학생들끼리 모여 공부를 한다는 점에 자극받고 동경하기는 했지만, 명문고 학생이라고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그 느낌이 좋았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시끄럽게 구는 한심한 학생들이나, 소위 말하는 '날라리' 없는 학교에 다니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희망대로 나는 명문고에 진학하고 졸업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중학교 때 나는 고등학교나 대학에서 배우지 못한 것을 배우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이 내 인생에서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데 묶을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친구로 사귀고 어울릴 수 있었던 시기였다. 물론 어느 사회를 가도 인간은 다양하기 마련이지만,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은 대체로 몇 가지 직업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직업과 계층이 다른 사람들끼리 허물없이 친해질 기회는 나이가 들수록 더욱 드물어진다. 당연히 평준화였던 초등학교, 중학교 때 만난 친구들과의 허물없는 이야기에서 지금도 나는 다양한 다른 삶들을 배우고 있다. 그 때에도 날라리들이 싫긴 했지만, 걔네들이 있어야 그래도 수학여행 반별 장기자랑에서 재밌게 놀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실은 이런 게 진짜 교육이 아닐까.
비교육적인 것은 명문고에 진학해서 뽐내고 싶다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때는 자아정체감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한다. 이 무렵 비평준화 지역의 학생들은 자기가 진학하는 학교를 기준으로 자신을 규정한다. 나는 명문고니까 우수한 사람, 나는 중위권 고등학교니까 보통은 되는 사람, 나는 A고와 S고 사이의 학교에 갔으니까 A고 애들보다는 못해도 S고 애들보다는 나은 사람. 원하는 학교에 떨어진 나는 입시의 패배자. 불평등이 인간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해도 언제 이를 겪느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평준화 이념은 단순히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의 논리가 아니라, 단일한 계층, 성격의 학생들이 모이는 것보다, 어린 시절 보다 다양한 환경을 지닌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살아가는 것이 교육적으로 더 바람직하다는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즉 교육은 지식의 전달 뿐 아니라 인성의 함양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학교는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이 되어야 한다. 교육의 수월성이라 하면 이러한 기능까지 포함해야 하는데, 그런 논쟁은 들은 적이 없다.
더욱이 평준화 체제가 반드시 교육(지식습득) 수월성의 저하를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경험한 바로 생각해보건데 확실히 상위권 학생들 간에는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비평준화 체제가 유리하다. 그러나 중위권 학교나 하위권 학교에서 성과는 어떠한지 구체적 연구결과를 본 적이 없다. 게다가 효율적인 지식전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학생들의 수준편차만은 아니다. 학급당 학생 수, 교사1인당 학생 수, 학교의 시설과 투자 등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학창시절 공부에 전념하고자 해도 방해받았던 고충을 널어놓는 평준화지역 출신 우등생도 있지만, 만약의 한 반 학생 수가 20명이었으면 어땠을까. 선생님의 업무가 적어 더 학생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면 어땠을까.
일선 학교에서 교육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율적 의사결정이 이루어 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대학의 학생선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국립대가 법인화를 통해 자율성을 얻고싶은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할만한 지점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들이 교육 전반의 '자율성'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여서는 안된다. 3불정책이 한국 교육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것은 사회의 패러다임 전반을 변화시키는 거시적인 정책을 동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단순히 평준화와 국가개입이 지고의 악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전 교육정책의 정 반대에 서서 무조건 자율화만 내세운다고 다 될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이것도 구름코끼리님, 잔인한 4월 - 이대로는 안 된다.
3. 학력차별은 불평등하지만 불공정하지는 않다.
명문대학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에 엄밀히 따져 명문대학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한다. 프랑스의 경우 NES나 그랑제꼴이 있고, 그 외 대학이 평준화 된 국가들도 분야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학교들은 있다. 게다가 이러한 나라들은 대학진학률이 40% 안짝이기 때문에 대학교육 자체가 일종의 지식 엘리트 교육이라는 암묵적 함의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국내의 모든 대학들이 서울대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 계서구조를 이루는 나라는 거의 없다. 일본 정도일까. 미국의 하버드가 굉장한 명문대접을 받지만, 이를 '세계 1위의 대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전세계에 한국인과 일본인밖에 없다고 한다. 이는 하버드를 각기 자국의 서울대, 도쿄대에 대입해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교육제도에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명문대학은 그 수가 많고 주립-사립 경쟁체제라는 점에서 한국보다 "독과점의 폐해"만큼은 덜하다. 일본조차도 역사학의 경우 도쿄대와 교토대가 양분하여 주된 학풍을 형성하면서 서로 경쟁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정치,경제,문화예술,학문 엘리트가 거의 손에 꼽을 만한 몇몇 대학에 평중되어 있다. 최장집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기득권의 동심원 구조가 겹치면서 강력한 보수적인 기득권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작 엘리트들 간의 경쟁체제는 실종되어, 일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학문적 다양성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명문대학이 있어서 문제가 아니라, 대학조차 거대 대기업이 쥐락퍼락하는 한국경제와 너무 닮아서 문제인 것이다.
또한 한국만큼 대학이 인격의 척도가 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배우자를 고를 때, 학벌을 따지는 것은 경제적 이유 뿐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이유도 크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교양없는 졸부로 취급받는반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더라도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 - 주로 학자나 교사 -은 존경해주는 풍조가 있었다. 물론 이 자체도 나름 문제이지만 최근들어 교육의 대물림이 극심해지면서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경제적으로도 소외당하고, 문화적으로 소외당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인터넷 뉴스에서 기사내용과 무관한 대학서열놀이가 툭하면 벌어지고, '듣보잡'이라는 모욕적 칭호도 이러다가 나왔다. 그러기에 학력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예인조차 학력을 위조하는 나라다. 어차피 명문대학에 다닐 수 있는 사람은 한정되어 있기에, 다수 사람들을 패자로 만들면서,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신념을 확산시키는 게 한국의 대학서열화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학력은 실력을 증빙하는 신호이며, 따라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불평등해도 불공정한 것은 아니라는 비판은 성립할 수 없다. 한국에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단순히 '학문적 능력'이 필요한 몇몇 직종에 국한되는것이 아니다.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인격적인 차별대우가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가능한 직종들의 처지는 너무나 열악하다. 일류대학 나오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인간대접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이에 대한 비판과 시정노력도 없이 학력불평등을 수용하라는 것은 인간평등과 존엄성의 이념을 포기하라는 의미와 다름없다.
이해찬은 교육부 장관 시절 "누구나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가는 나라"를 꿈꾸었지만, 그 역시 대학이 인격의 척도가 되는 환경에서 벌어나는 발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더 바람직한 것은 "누구나 대학을 가지 않아도 자기 일 열심히 하면 먹고 살고 존경까지 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꿈같은 세계가 결코 아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독한 학벌사회인 일본의 경우에도 3대가 라면집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나름 존경해준다고 한다. 독일, 스웨덴 등지에서는 공장 숙련공들의 지위가 높다. 우리나라 울산현대 노동자들은 (노동강도가 어떻건 간에) 경제적 지위는 나름 높을지언정 '사회적'지위는 비교할 수 없다. 노르웨이의 버스기사들은 사무직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일하며 그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임금불평등 체계를 개선하고, 큰 소득을 벌지 않아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는 복지제도가 이러한 일의 기반이다. 우리는 못 하는 게 아니라 엄연히 안 하는 것이다.
주1) 이런 현상이 가장 극심하게 자행되는 과목이 '영어'다. 영어의 경우 사교육이 상식처럼 되어 있고, 교사들도 자연히 사교육을 이미 받은 것을 전제로 하고 가르친다. 계층에 대한 과목 성적차가 가장 큰 과목도 영어다. 이 시스템에서 영어몰입교육은 그야말로 불에다 기름붓는 격이다. 효과도 문제일 뿐더러, 영어몰입교육에서 남들보다 더 잘 하기 위해 과외를 하는 게 불을 보듯 뻔하니까.
주2) 근데 이 조차 사실 정확한 자료를 본 기억이 없다. 막연히 비평준화가 교육수월성에 좋다고 하는데 정말일까. 확실한 건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좋은 듯 하다. 그러나 상위권만 국민이 아니잖아.
# by 은하 | 2008/04/19 02:45 | 생각 | 트랙백(3) | 덧글(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