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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5월 15일
매우 중요한 레포트를 하나 제출하지 않고 A+을 받은 전공 수업이 있다. 사실은 제출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한 거였지만, 능력보다는 성실성과 인내의 문제였다. 이 대목이 더욱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더구나 나 때문에 레포트 제출 기한도, 수강생 전체의 성적입력기간도 늦어졌는데, 나는 내겠다는 결과적 거짓말만 되풀이하다 어느 순간 제츨도 해명도 포기하고 잠적에 들어갔다. 마침내 성적이 떴을 때, 나는 그 교수님이 내 성격을 엄청나게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반 년간 단 하루도 마음이 편했던 날이 없었다. 당당하게 이 곳에 머무르지도 못하고, 미련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자신에게 끊임없는 환멸을 느끼는 하루하루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도피, 안주, 회피, 비겁. 관성, 낙오! 내가 하는 일 하나하나에 부정적 딱지들을 붙여갔던 것도 생각해보니 이 무렵부터였다.
그 레포트보다 훨씬 더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찾아간 사람은 바로 그 교수님이었다. 나에게 그 분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목이 메어서 말이 잘 안 나왔다. 감기 탓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 진심의 전달이란 역시 '화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 자신과 상대방에게 얼마나 떳떳할 수 있느냐. 여기서부터 대답이 No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핵심을 비껴가는 대화를 거듭한 끝에, 시간이 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구실을 나서려는데 등에다 대고 교수님이 밑도 끝도 없이 한 마디 툭 던지신다. "레포트 안 낸 거 때문에 그래?" 버릇없이 고개를 끄덕여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순간적으로 왈칵 맺혀버린 눈물방울을 어떻게든 가려야 했으니까. 그런다고 가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용서해 줄게. 괜찮아." 사태가 더 심각해졌다. '고맙습니다'도 '죄송합니다'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여 인사하고, 허둥지둥 나와버렸다. 아아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 들켜버린 거 같다. 이 사람 해도해도 너무했다. 정작 오늘 나눈 수많은 말들은 핵심을 겉돌았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을,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을 정확하게 알아채시다니. 나조차 모르고 있었던 내가 자신감을 상실한 근본적 원인을 간파하시다니. 사람이 이 정도로 명민하면 좀 얄밉다. 그런데 창피하게 길거리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가운데에서도, 어쩐지 숨통을 잡고 있었던 억센 손아귀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드는 걸 보아, 아무래도 애지간히 이 말을 듣고 싶었던가보다. 다 빠져나갈때까지 계속 울었다. 그만 울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한 줄기 지나갔다. 나 정말 이대로 졸업해도 되는 거에요? yes라 함은 다음 단계를 보고 싶다는 것이겠지. 그것도 보다 더 책임있는. 2년 반 동안 과에 정 붙인 것도, 사람들과 친해진 것도 대체로 이 사람 수업 덕분이었는데, 이제 떠미는 것까지 맡아주신다. 오늘은 왜 하필 날짜도 스승의 날인거냐. '아니, 내가 애초에 이거 핑계대고 찾아간 것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되면 매년 이 날이 올 때마다 민망하잖아' 하고 생각했다. 역시 선생님 탓이다. 그리고 한 달 후, 종강파티에 간만에 정말 실실거리며 나타나는 건 내 몫이고. 아니 선생님 왜 애를 울리고 그러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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