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6월 12일
촛불정국 논쟁점에 대한 생각들
10대, 정선희, 예비군, 깃발, 정운천
그리고 앞으로의 향배.
☆ 10대VS 20대
이명박 정부를 출범 100일만에 뒤흔들어놓은 이 정국을 초반에 이끌었던 사람은 다름아닌 10대들. 때문에 이를 근거로 10대가 무엇을 알고 나왔느냐, 괴담과 선동에 휘말렸다, 공부하기 싫었다 등 촛불시위 자체를 폄하하려는 있었는가하면, 10대와 비교하며 행동하지 않는 20대에게 맹비난이 일이고 했다. 누군가는 10대는 386 세대의 자녀, 20대는 유신세대의 자녀라면서 가족주의적 계보학으로 분류하기까지 했으니 앞으로 한국 사회는 이 두 세력간의 힘겨루기가 펼쳐질까?
정담은 아니오.
1) 10대들의 행동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 존재가 의식을 결정했다. 10대와 비교하며 20대를 비난하는 것과 10대들의 정치참여 자체를 폄훼하는 것은 사실 그 뿌리는 동일하다. 10대들의 정치참여를 '의식'차원에서만 다루는 것인데, 이 의식이 성숙하냐 미성숙하냐 그 차원에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괴담론의 편을 들어주자면, 이 정국에 10대들이 처음에 깊은 생각을 가지고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 대한 즉자적 반발로 나왔다는 것은 맞는 판단인 듯 하다. 물론 그 판단을 폄훼하는 것까지 동의하는 건 아니지. 인간은 피부에 와 닿는 억압과 부조리를 느낄 때 즉자적으로 반발하는 법. 그 동안 MB정권이 영어몰입교육, 학교자울화 정책 등 10대들의 목을 직접적으로 옥죄는 정책을 펼쳐왔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거기다가 학교급식문제는 하루이틀이랴. 이러니 10대들이 뿔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MB정권의 사회정책이 결국 투표권도 없는 사회적 약자인 10대들의 '당장 현재의 복지'부터 공격하고 있다는 걸. 나 광우병 쇠고기 먹고 의료민영화 정책으로 병원갈 돈 없어 죽으면 대운하에 뿌려주오가 말해주지 않나. 괴담론의 봐 줄 수 없는 치명적 오류는 10대들을 정치와는 무관한, 아니 무관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애 많이 썼다.
2) 10대들의 또다른 변수는 이들은 학교에서 억압적인 집단생활을 하기 때문에, 거꾸로 항상 생활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괴담(?!)이 퍼지는 데에도, 집회에 몰려나오는 데에도 큰 호재로 작용한다. 집회 나가는 데 발걸음을 가장 붙잡는 것은 귀찮음과 더불어 '함께 갈 사람이 없다'. 옆에서 누가 가자고 부추기면 때로는 귀찮음도 넘어설 수 있다.
3) 20대가 초반에 참여가 미온적이었다는 것은 역시 의식 차원보다는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아무리 요즘 대학생 암울하다고 해도 10대보다는 그래도 신체의 자유(!) 면에서는 20대가 더 낫다. (원더걸스가 10대라는 점이 결코 10대들이 20대보다 나은 처지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니잖나!) 10대만큼 코너에 몰려있지 않으니까 즉자적 분노도 덜한 편이다. 또 하나 문제. 같이 갈 친구가 없다. 실제로 초반 촛불집회에서 20대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대학문화에서 기층공동체가 워낙 붕괴되었다보니, 예전처럼 깃발들고 학교 단위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 혹은 커플끼리 삼삼오오 참여한 탓에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전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후자는 살짝 서글픈 감이 있다. 확실한 건 우리 부모님이 386이 아니라 시위에 못 나오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4) 그러나 어쨌거나 요즘 20대 욕하는 소리도 쏙 들어갔다. 지금은 20대 대학생들은 촛불시위대의 주축이다. 박권일의 말대로 10대와 20대는 현재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는 처지이며, 2002년 효순,미선이 사건이나 이라크 파병반대 시위에 나온 10대들이 지금의 20대였다. 현장으로 등 떠미는건 상황과 세팅된 조건이지 타고난 천성 혹은 몸 속에 흐르는 거리의 유전자 따위는 아니란 말이다. 바꿔말하면 상황에 따라 지금의 10대들도 절망하고 얼마든지 정치혐오로 빠질 수 있다는 것.
5) 문제는 지속성이다. 10대나 20대나 88만원 세대로 앞날이 암울하다면, 적어도 자기 앞날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주어야 한다. 오호라 광장과 촛불의 경험. 스스로 발견하고 깜짝 놀란 자신들의 힘. 좋다. 그러나 맨날 집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과감히 제안한다. 10대들에게는 투표권을. 20대들에게는 대학자치권을. 투표는 이해관계의 게임. 가끔 자질론을 들먹이는 사람도 있다만 이 경우에도, 똑똑해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투표를 통해 똑똑해지는 것이다. 19세에서 20세로 점프하는 순간 판단력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또하나, 20대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힘. 대학공동체의 붕괴. 일단 과도한 등록금, 비효율적인 경쟁체계. 생각해보니 말야, 10대 때 투표권이 있었으면 20대에 이 꼴로 만드는 정책이 미리 저항할 수 있었을텐데. 그치?
☆ 정선희 사건
정선희 사건은 다소 안타깝다. 정선희의 발언은 있을수도 있는 얘기였다. 촛불시위 참가자 가운데, 선동과 흥분에 휩쓸려 나온 사람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 솔직히 그런 경우도 없다고 할 수는 없잖아. 1만명이 모였는데 그런 사람 하나 없다면 그것 또한 신기한 일 아닐까. 이를 두고 촛불시위대를 모욕했다고 분노하는 것은 지나친 처사다. 방송인 정선희 씨가 촛불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설령 정말 꼴통적인 생각이 있다고 할 지언정, 그 역시 나름 개인의 사상의 자유다. 더 큰 문제는 '촛불시위' 자체가 성역화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성과 긴장이 필요한데, 단지 촛불시위대를 비난한 것으로 방송을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매장시킨다면 '우리는 무조건 옳다'라는 위험한 신념을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예비군복
사실 나는 이 아이디어에 긍정적이었다.
다만 '보호'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집회현장서 지겹게 듣는 여학생들 물러가세요. 여성들은 뒤로 빠지세요. 순식간에 시민에서 주변인이 되고야 마는 여성들. 거창한 사건일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작 낮은 담장하나 넘는데도 이런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더욱 기분이 나쁘고 사기가 꺾인다. 여튼. 그리고 시민 가운데 누가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것은 위계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지도부 없이 자율적으로 생동하는 것이 이번 정국 시위대의 큰 자산이었는데, 그 자산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일이다.
이 땅의 시민으로, 여런 누이들과 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제로 끌어다 군대에 집어넣는 국가를 조롱하기 위해 예비군복을 입고 나온다면 나름 유쾌한 일로 받아들이고 싶다. 군대 가 있는 친구, 동생, 선후배, 애인들과 함께 하는 기분마냥. 그런데 그 이상은 참자^^ 이것도 설마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나?
☆ 깃발
10대들은 대학생들이 깃발들고 오는 것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사실 나도 고2때 효순-미선 추모집회에 친구들이랑 갔을 때, 왠지 대학생들의 깃발이 배타적이고 무서워보여서 그닥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어 보면 알 수 있다. 고교생들처럼 똑같은 시간대에 끝나서 똑같이 현장에 찾아오는게 아닌 대학생들은...깃발이 없으면 어떻게 대오를 찾냐구 ㅠ.ㅠ
그보다 깃발이 집회에서 기능하는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깃발이 나름 집단의 균열과 갈등으로 드러나는 구조적 문제를 표상하고 있는 탓이다. 쉽게 말해보자면 왜 집회에 굳이 혼자가 아닌 '집단'의 이름으로 나와야 하는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보면 된다. 깃발은 결국 그 집단의 이름을 걸어놓는 것이니까.
물론 뻘줌함을 참을 수 있다면 아무 집단에 속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나오는 것도 무방하다. 더욱이 이번 시위의 대세는 커플참여, 가족참여라던데. 다만 집단의 이름으로 가는 것의 장점은 1) 용기가 없거나, 같이 갈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2) 모금활동 등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기반이 된다 3) 정치적 사안에 대한 개인적 기호를 넘어서서,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1),2)도 심리적으로 중요하지만 사회전체적으로 봤을 때 3)을 무시할 수 없다. 교복부대의 집회참여에서 교육제도의 문제점이 함께 거론될 수 있었고, 유모차 부대가 등장하면서 먹거리 위험성 문제가 한층 더 부각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기능이다. '집단'이란 결국 사회가 어떤 계층적 층위로 쪼개어졌는지 그걸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정치의 목적이 사회의 균열들을 극복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라면, 그 균열부터 일단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게 바로 대의제에서 대표성의 문제다. 누가 이 문제에 반발하는가? 이것부터가 정치적 물음이다. 깃발은 바로 그들이 누구인지 보여주는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깃발 들고 집회 나가면, 그 집회 나갔던 사람들간에 단결이 공고해지는 그런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 대학생들은 주구장창 깃발을 들고 나온다. 하지만 그것이 시민들과의 배타적 장벽이 될 것인가 아닌 것인가는, 깃발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맥락에 의존한다. 2004년 탄핵집회때 "폐인들도 화났다. 탄핵 뷁"이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나타난 DC 인사이드를 보며 배타적이라 욕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밌고 놀라워하기만 했지. 깃발논쟁을 일으켰던 것은 시민사회와 괴리된 학생운동권 그 자체였다만, 결국 거듭되는 시위 끝에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그런 것 공동의 경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운동권이 주도하지 않는 대오에서 시민들은 깃발과 함께 거리를 행진한다. 구호에도 답하고, 즉석 색소폰 연주에 노래도 함께 부르며.
☆ 정운천 장관 발언
이는 대책회의의 입장에 찬성한다. 원칙상 발언하는 기회를 주었어먀 민주주의 정신에 부합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운천 장관의 경우 원칙상으로나, 정략상으로나 6월 10일 광화문 현장에서 발언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1) 정운천 장관은 일반 시민들과 달리 공개석상에서 충분히 의사를 밝힐 기수 있는 사람이었고, 시민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대다수 시민들의 뜻과 배치되게 고시를 강행해 놓고서는 집회에 찾아온 명분은 무엇일까. 장관 정운천이 아니라 시민정운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정운천이 쇠고기 정국에서 비판을 받은 이유는 그가 '장관'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집회현장에서 쫓아낸 것도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는)'장관'정운천을 쫓아낸 것이지, '시민'정운천의 발언기회를 막았다고 보는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지 들어봐야 알지 어찌 아느냐? 만약 그러고자 한다면 미리 이를 사전에 공지하는 것이 장관의 일처리겠지요.
2) 집회는 자기변명 들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난상토론과 같은 무대도 마련할 수 있겠으나, 명백히 쇠고기 수입 반대를 표방하는 집회에서 '원칙상'으로 정운천 장관의 말을 꼭 들어주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정운천 장관을 허락하지 않는 것 자체가 의사 표현이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의사표현의 자유는 바로 이러한 것까지 포괄하는 것이지, 모든 장소에서 모든 발언을 용인한다는 의미는 아닌 듯 하다.
3) 충돌과 돌발상황 발생 우려. 50만명이 운집한 집회에서 이 문제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인본주의적으로 시민 정운천 장관 개인의 안위를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91년 노태우정권 시절 정원식 총리의 한국외대 계란세례 사건이 새삼 또 일어나면 어쩔 뻔 했나. 이를 생각하면 주최측이 정말 현명한 판단 한 것이라고 본다.
☆ 집회순수성
순수는 무슨! 원래 집회는 정치적이야. 정치적 메시지를 형성하고 보내는 곳이란 말이야.
민주당이건 한나라당이건 민주노동당이건 진보신당이건. 이 메시지를 빨리 알아듣는 녀석이 승자. 하지만 궁극적인 승자는 그 메시지의 발언자이다. 촛불정국쯤 되면 거의 전국민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다시 말하자면, 시민들의 승리는 정치건에서 방점을 찍어야만 마무리 되는 것이다.
결국 정치로 비롯된 문제는 정치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그걸 아는 시민들이 똑똑한 시민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를 요구하는 집회야말로 '집회다운' 집회 아닐까나.
정치적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나쁜건 정치적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사실을 왜곡했을 때의 문제다.
...아 힘들다. 전망은 그냥 담번에;;ㅠㅡ
# by 은하 | 2008/06/12 05:58 | 생각 | 트랙백(1) | 핑백(1) | 덧글(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