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08월 12일
양궁대표팀의 지옥훈련은 결코 우리의 자랑이 아니다.
한 치의 빗나감도 없었다. 비바람에도, 관중들의 야유에도 굴하지 않고 정확하게 골든존에만 화살을 꽂아넣는 한국양궁선수들에게는, 일종의 신기(神氣)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한국 단체 양궁팀은 여자 올림픽 6연패, 남자 올림픽 3연패의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며 금메달을 따 냈다. 국내의 환호성은 물론, 전세계 양궁계의 경이어린 시선 속에서, 베이징 하늘에는 애국가가 울려퍼졌지만, 나에게는 그 순간에 영화 <괴물>에 나오는 배두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괴물>에서 배두나는 주인공 여자아이의 고모 역할로, 직업은 전국체전 동메달리스트 양궁선수로 설정되어 있다. <괴물>에 등장한 인물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배두나 역시 별 볼일 없고 불안정한 인물로 나온다. 매번 막판의 실수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번번히 고배를 마시는 주목받을 일 없는 양궁선수인 것이다. 여자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건 한 선수가 같이 훈련하던 동료들과의 피말리는 선발전과 그들을 떠나보내면서 느꼈던 아픔을 얘기하며 눈을 붉히기도 했는데, 아마 그 떠나간 자들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한국 양궁 대표팀의 저력은 뭐니뭐니해도 지독한 훈련에서 나온다. 6개월간의 길고도 지독한 대표선발전 와중에 극단의 스트레스와 악천후에 대비하는 법을 자연스레 터득하는 것은 물론, 대표로 선발된 이후에는 무려 북파공작원 훈련장에서 기절 직전의 훈련도 받는다고 한다. 이쯤 되면 그/녀들은 단순히 스포츠 선수가 아니라 거의 전사로서 길러진다고 봐도 무방하다 싶었다.
세계 최강 양궁은 전략과 땀의 결정판 (다음2008베이징게시판)
연합뉴스 한국 양궁은 왜 강할까
그러나 이런 무적의 양궁전사를 길러내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한없이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한국의 스포츠 시스템이 깔려 있다. 한국양궁팀의 전력 이유 1순위로 손꼽히는 어릴 적부터 활을 잡는다는 대목은 결코 자랑거리가 아니다. 서양의 선수들이 대부분 16세즈음 학교나 직장 등에서의 클럽활동의 일환으로 활을 잡는 방면, 한국은 10-12세 가량 아직 진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어린 선수들에게 "학교의 명에를 위해" 활을 쥐어준다. 어린 나이부터 혹독한 훈련을 거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 그들은 이제 오직 "양궁선수"로서만 키워지는 것이다. 보통 또래들이 겪는 학교생활이나 다른 교육은 포기한 채 오직 양궁에만 매달리며, 언젠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는 꿈을 꾼다. 이렇게 키워진 선수들이 전국에 1400명이고, 국가대표는 단 3명이다. 국가대표 3인의 영광은 이에 들지 못한 1387명의 피눈물 속에서 피어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국가대표에 선발되지 못한 양궁선수들이 즐겁게 활을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양궁이 국내에서 프로스포츠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스포츠로서 저변이 널리 확대되어 일자리가 충분한 것도 아니다. 더욱이 어릴적부터 운동만 해온 양궁선수들은 다른 직업을 가질만한 기술이나 능력을 교육받지 못한 채, "나라의 영광"을 빛낼 수 있는 자가 되지 못하면 그대로 방치되어 버린다. 우리나라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신세가 이러하고, 영광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조차 이런 불안정한 처지에서 겨우 한 발짝 비껴있으면서 동료들의 아픔을 짊어져야만 한다. 그러기에 한국 선수들은 메달을 따고 울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비단 양궁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실 스포츠 거의 전종목에 해당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펜싱 남현희 선수의 성형파문은 극단적으로 자유가 침해된 허울좋은 국가대표 선수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고교축구의 4강제도는 숱한 어린 선수들을 희생시켜가며 엘리트 선수들을 키워낸다. 안타깝게도 극단의 경쟁은 결국 파벌을 부르기 마련이다. 축구계의 고려대라인, 유도계의 용인대 라인과 마사회의 힘겨루기 등의 스포츠답지 않은 눈살사나운 모습은 한국의 야만적 스포츠계가 만들어낸 결과다.
한국 스포츠계의 과거와 성과를 모두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약소국의 설움을 스포츠를 통해서만 날려버릴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고,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따야만이 전 세계에 Korea란 이름을 겨우 알릴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엘리트 스포츠가 그러한 기대에 상당부분 부응해 오고, 국민들에게 기쁨을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제 "국가의 영광"과 "가난의 한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즐기기 위해 스포츠를 원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이에 응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기사에 따르면 양궁관계자들은 벌써 2012년 런던 올림픽 대회를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활을 잡으려 하는 어린 선수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당연한 결과다. 10여살 때의 선택이 자칫 인생을 좌우하게 되는 학교체육 시스템에서 누가 선뜻 양궁선수를 택하겠는가. 사회는 점점 민주적으로 변화하는데, 엄청난 지옥훈련과 이를 유지하기 위한 억압적 위계가 남아있는 직업 스포츠계에 붙어있을 무엇때문에 붙어있고자 하겠는가. 이로 인해 양궁금메달을 더 이상 못 따게 된다면 아쉽지만, 오히려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1397명의 배두나들이 헛되이 고생스러워 하다가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시민들이 스포츠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란 점은 더없이 안타깝다.
언제나 올림픽 때만 되면 비인기종목에 대한 지원 목소리가 높다. 열약한 현실의 설움 속에서도 메달을 따오는 핸드볼, 하키, 펜싱 등의 선수들에 대한 기특함과,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줘도 1승은켜녕 시원한 경기조차 못 보여주는 축구에 대한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다. 그런데 비인기 종목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지원금을 늘리더라도 지금같은 억압적 스포츠 시스템이라면 선수층이 얇아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평상시의 국민적 관심을 호소하지만 또한 가뜩이나 프로스포츠 천국에다 이제 피겨와 수영경기까지 챙겨봐야 하는 한국 국민들에게 챙겨봐야 할 스포츠를 더 늘리는 것은 어찌보면 고역이다. 더욱이 스포츠의 경우 "자기가 직접 해 본" 종목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게 되어있다. 그러니 한국에서 사격,양궁,펜싱, 핸드볼이 축구,농구만큼 인기를 끌 일은 요원하다.
방법은 단 하나. 한국에도 루트비히 파이셔와 같은 선수가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멋진 매너와 깔끔한 외모(!)로 이번 한국에서는 박태환 못지 않은 스타가 되어버린 유도선수 파이셔다만, 그의 본업은 군인이다. 한편으로 유도가 "취미"이기에 그는 진심으로 올림픽을 즐길 수 있었고, 그러한 매너도 선 보일 수 있었다. 지옥훈련이 아니라면 실력을 보장할 수 없다는 편견은 그의 랭킹과 은메달이 이미 반박해준다. 유럽 선진국 선수들은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나라처럼 국가의 명예를 빛낼 엘리트 스포츠전사를 양성하는 것은 중국이나 구 소련의 방식이다. 여전히 중국과 구소련에 남아있고 싶은가?
베이징 올림픽의 메달러시는 한편으로 이는 한국의 88올림픽 체육 시스템의 최후 전성기라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금메달을 쏟아내는 데에는 선수보다 "전사"들이 유리할 지 모르지만, 한국은 이미 개개인들이 전사가 되기를 거부하는 사회단계에 접어들었다. 원래 민주사회란 그런 법이다. 덕분에 여자 핸드볼 선수들의 평균나이는 이미 30을 넘겨버렸고, 다음 세대는 자유와 창의적 플레이에 대한 독려없이, 악바리 근성만 요구했다가는 헛물켜기 딱 좋을 그런 무리들이다. 이미 죽을 쑤고 있는 국가대표 축구팀이 그 사례다. 베이징에서는 아니겠지만 분명 인위적인 메달러시는 어느 순간 끊길 것이다. 그 때 가서, 더 빡센 엘리트 체육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겠는가? 그렇다면 사회시스템 전반을 20년 전으로 후퇴시키자고 해야 할 것이다.
메달을 따기 위해 선수들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이 자연스럽고도 즐겁게 운동하다 보니 그 결과로 메달을 따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은메달에도, 동메달에도 환하게 웃으며 깡총거릴 수 있는 힘은 거기에 있다. 메달을 따지 않아도 좋은 건 물론이다. 비인기종목이 생활스포츠로서 자리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하지만 노동시간 단축과 교육개혁도 같이 일어나야겠지만-_-;;) 눈물과 한이 서린 국가대표들, 그리고 국가대표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수없이 많은 이름없는 선수들 대신에, 우리나라에서도 긍지높은 "아마추어"들을 보고 싶다. 메달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단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일 뿐이어야 한다. 사실 메달보다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기에 지금처럼 많이 따오지 않아도 우리들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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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은하 | 2008/08/12 11:43 | 생각 | 트랙백(7) | 핑백(2) | 덧글(1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