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을 업으로 택하고자 하는 그대에게.

 또 다시 대학원 원서접수 시즌이 왔다. 일반 기업 공채와 달리 6개월에 한 번씩 있기 때문에 자주 돌아온다는 느낌을 받지만, 그 만큼 사람 마음도 자주 흔들어놓는 법. 게다가 그냥 상위교육과정으로의 진입이라고 생각하면 사실 여태까지 해오던 것 중에 그나마 유일하게 잘 했던 거라 마음이 가벼워지려 하는데, 누구 말마따나 종잇장의 '석사과정'이란 단어는 왜 이리 큰 무게감을 주는지.

대학을 다니면서 진지하게 생각해본 대학원 원서 접수 기간이 3번 지나갔지. 그 중 2번은 주저주저하다 끝내 쓰지 않았고 한 번은 아예 다른 곳을 썼다. 막다른 골목에서 탈출하자는 심리였다만 덜컥 붙어버렸고, 그랬기에 더 많은 고민을 하다 엎어져 버렸다. 그러느라 대학원 원서쓰게되기까지의 모든 고민을 겪어봤다는 게 위안이랄까.

 4번째 접수 기간은 그냥 그럭저럭 편안하게 지나가고 있다. 대학원에 관련한 모든 고민과 방황 끝에, 이제 대학원을 안 쓰는 심리까지도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관악 구렁이 만세! 갈망하는 자는 구원받는다는 <파우스트>의 한 대목에도 만세!

근데 구원은 결국 자기가 하는 거더란 말이지. 답사가서 자문해 보았어. 이런저런 핑계와 구실들을 다 제껴놓고 말이야. 우리 집이 어마어마하게 부자라서 내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부담도 전혀 없고, 나는 또한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수 있는 재능이 있어. 운명의 신인지 여신인지 확실히 그 분은 나의 편이야. 이 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있어? 자 그래도 너는 공부를 계속 할래?

나의 답은 '아니다'였어. 정작 그런 상황이 온다면 말이야, 물론 평생 공부를 하는 삶이란 멋있기야 하지만 나는 답답해서 못 견딜 거 같단 말이지. 차라리 거리로 나갈래. 하늘이 언제나 나의 펀이라면 그 놈과 손을 맞잡고 혁명을 할 거야. 물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적절하게 수정이 가해져야 하겠지. 하지만 이제 확실해 진 건 내가 평생을 걸고 이루고 싶은 나의 진짜 꿈은 학문이 아니란 거야.

 스케일 큰 현세주의자. 아마 나를 표현하는 말 중 가장 적당한 말일거야. 나는 당면한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관심사가 쏠려있는 현세주의자라고. 다만 이 세상 고민 저 혼자 다 짊어진 듯 스케일이 광활한 건 아마 지금 사는 나의 삶이 '과거와 미래 사이 그 어느 지점'에 서 있다는 '역사의식' 때문이겠지.

5년 동안 학부에서 지지고 볶았던 역사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바로 이 진실이지, 역사적 지식 그 자체를 더 생산해내라는 건 아니었어. 그런데 또 모르지. 나 말고 영혼이 맞는 다른 녀석에게는 그것을 또 원할 거 아니겠어. 어떤 존재든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것들이니 말야.

 자, 이제 모든 조건은 클리어야. 그 동안 나를 가장 미치게 했던 건, 그토록 오래 지녀왔던 나의 소망을 외부의 힘(가정형편, 부모님과의 갈등, 나랑 잘 안 맞는 학풍 등)  혹은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 때문에 포기해야한다는 억울함과 무력감에서였지. 그런데 말야, 그거 그냥 착각이더라구. 결국 선택하는 건 자기 자신이야. 이런 저런 어려움이나 핑곗거리가 있어도 할 사람은 그냥 하게 되어있어. 그러니까 중요한 건 어쨌거나 선택했다는 행위 그 자체야.

  애드거 스노 같은 종군(?)기자를 동경했더랬지. 허나 어리버리한 내가 했다가는 죽기 딱 좋을 직업 같다고 했더니, 은영언니가 전에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라 그냥 삶이 그곳으로 밀어넣은 것이라고 말 했어. 지금 절실하게 동의해. 아니 그들 뿐일까. 모든 사람의 운명은 그냥 삶이 거기다 나를 쳐박아 버렸기에 이루어지는 거 아니겠어. 근데 그 놈의 삶은 자기 안에서 나오더란 말이지.

  나를 미치게까지는 안 해도 곤혹스럽게 하는 부분은 아직까지 남아있고, 어떤 건 컴플렉스가 아니라 恨이 되어 버려서 평생 안 없어지겠지. 뭐 그래도 다른 운명이 날 간택했으니까 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이게 답사갔다 와서 뭔가 후련해진 이유야.

  내가 했던 이런저런 고민을 다 거친 끝에, 이미 대학원에 간 사람도 있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야. 이 모든 고민을 이겨내서 대단한 게 아니라, 공부로부터 그냥 간택받은 그 자체로 대단한거야. 다른 운명에게 간택받은 나와 같이 말이야. 그렇게 모든 운명에 경의를.

  지금 대학원 원서를 앞에 두고 고민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불확실한 미래때문에 고민할 것이 산더미같을테고, 우울하게도 뭐 앞으로도 그럴테지만-_-;; 당신이 공부를 택한게 아니야. 공부가 당신을 택한거고, 대학원이 당신 앞으로 온 거지. 남은 건 선택받은 자의 자부심. 그에 합당한 노력. 그리고 당신의 앞날에 당당하게 치어스☆

by 은하 | 2008/10/22 23:56 | 생활 | 트랙백 | 핑백(1) | 덧글(22)

트랙백 주소 : http://kixzero.egloos.com/tb/395236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Linked at 누구의 것도 아닌 집—푸른 문.. at 2008/11/04 00:02

...   학문을 업으로 택하고자 하는 그대에게: “그러니까 중요한 건 어쨌거나 선택했다는 행위 그 자체야.”   '양심의 자유'와 군대, 그리고 강의석: “분단 상황에서 평화의 상상은 허용되지 않는가”   ... more

Commented by 칠월 at 2008/10/23 00:05
아 이 글 너무 좋아요ㅠㅠ 그 동안 눈팅만 하다가 처음 덧글 답니다. 은하님도 치어스☆
Commented by 나아가는자 at 2008/10/23 00:39
운명은 삶에서 나오고, 삶은 자기 안에서 나온다. ...저는 제 안에 얼마나 좋은 것이 있는지 확신이 안들기 때문에...문득 두려워지는 군요.
대학원...가고 싶지만, 제 스스로 능력이 안된다고 절망하고 있지요. 제 블로그에 방금 끄적인 글에서도 말한 바이지만, 제대로된 지식도 없는 저를 공부가 택해줄런지...
Commented by Wingyㅋㅋ at 2008/10/23 00:42
저도 눈팅만 하다가 덧글답니다...ㅎㅎ
공부가 앞으로도 계속 저를 택하련지는 모르지만...ㅡㅋ
우리 모두 화이팅입니닷!!
Commented at 2008/10/23 01:0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자그니 at 2008/10/23 02:39
...전 공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응?)
Commented by 코나 at 2008/10/23 03:10
브라보
Commented by 중간자 at 2008/10/23 06:34
투 섬즈 업.
Commented by 말하는당근 at 2008/10/23 09:25
공부는 본디 하고 싶어서 해야하는 것이지만, 묘하게 자꾸 해야해서 하게 된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 글을 읽으니 그 생각이 더 심해지는군요.
Commented by Lectom at 2008/10/23 11:13
뭐... 저에게 공부는 그저 재미있는 놀이중 하나여서 말이죠.. (이렇게 말하면 공부 무지 잘하는거 같지만 사실은 반대 ㅡㅡ^;;;;;; ) 그냥... 재미난 것만 하고 살아 보려구요 ㅋㅋㅋ... 그나저나... 이제 얼굴 좀 보여 주세요? ㅋㄷㅋㄷ
Commented by 은하 at 2008/10/23 14:36
칠월//치어스>_<.......근데 조석만화 다들 너무 열심히 보는 듯 ㅋㅋ
나아가는자, Wingyㅋㅋ//모르는 건 아직 안 왔다는 거고, 조금 더 갈 데 까지 가 보면 공부건 뭐건 내게 맞는 운명이 오겠지요 ㅋ 화링~
비공개//고마워요. 생일은 잘 보내셨는지.
자그니//어맛?ㅋㅋ 저는 딴 놈 알아보려고.
코나//Yeah~
중간자//브이^^
말하는당근//누가 공부를 본디 하고 싶어서 한대요.ㅋ
Lectom//11월 3~13일 제외하고, 월토일 어드매쯤
Commented by 주현 at 2008/10/23 14:38
이거구나. 싸이 답글 보고 왔어.
너도 치어스! 고마워. 시험 끝나면 맥주 한 잔 ㅇㅋ? ㅋㅋㅋㅋ 성춘이랑 주용한도 같이 보면 되겠네 ㅋㅋ
Commented by 은하 at 2008/10/25 01:57
1학년때부터 대학원 가겠다는 사람 중에 몇 명이나 남았나. 물론 다들 각자의 이유가 있고 다른 훌륭한 꿈들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어쨌건만 그걸 5년간 견지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신을 자랑스러워 할 자격은 있는 거야.
Commented at 2008/10/24 03: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은하 at 2008/10/25 01:58
논문제목 비밀방명록으로 알려주시거나 문자로 보내주세요 ㅋ
Commented by 玄月 at 2008/10/24 22:53
내일 대학원 시험을 앞두고(근데 넌 지금 뭐하고 있니-_-) 글을 읽으니 기분이 굉장히 묘해지는군요. '치어스☆'라는 은하님의 말 한 마디에 힘을 얻고 갑니다;)
Commented by 은하 at 2008/10/25 01:58
시험 잘 보세요 :)
Commented by 이샤 at 2008/10/25 06:22
언니 미안해. 나는 "하늘이 언제나 나의 펀이라면"에서 터져서 글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응 그래 하늘은 언제나 언니의 fun이야. 하. 글 참 좋은데 한참 웃느라 집중을 못했네 ..........
Commented by 은하 at 2008/10/26 21:29
사람들은 대체로 내가 의도한 부분에서는 안 웃고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대목에서 웃곤 하더라고. -.- ㅋㅋㅋ
Commented by 흰우유 at 2008/10/28 17:52
멋진 글이에요~!

저 역시 내년에 대학원엘 가는데..
{공부하고 싶은 마음 + 돈 벌어야하는 현실} = 파트타임
이렇게 나오더군요.

운명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탄성을.
Commented by 은하 at 2008/11/21 01:42
화이팅입니다! 우유님은 왠지 끝까지 공부를 하실 거 같았어요^^
Commented by DAYBREAK_ at 2008/11/09 01:46
그래서 넌 지금 머 하고 있냐.ㅋㅋ
Commented by 은하 at 2008/11/21 01:43
이런게 궁금하면 전화를 했어야지 이 사람아 ㅋㅋ 어쨌든 이젠 알았지?ㅋㅋ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