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2월 28일
나의 인턴 낙방기
3부작 사이코 드라마 인턴 낙방기 !!
두둥!!
1부. 워커홀릭은 울지 않는다
나는 일단 부딛치고 보는 모험가 타입은 결코 아니다. 머릿속에서 가능성 계산과 계획이 다 끝난 다음에야 움직인다. 그러고 나서 좀 열심히 움직여서 그렇지, 어떤 면에서는 결코 진취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과정보다는 성과. 거꾸로 말하면 '내가 할 수 없어 보이는 일'에 대해서는 아예 처음부터 포기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바이올린. 중학교 때 첫사랑님. 3번이나 있었던 기회에도 쓰지 않은 동양사학과 대학원 지원. 각종 인턴 지원. 저번 KBS 공채. 그 외의 여러가지.
더 이상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무렵, 나는 하나 있지만 수업을 제대로 듣지 않아 독학에 의존해야 했던 기말고사에 허덕이고 있었고, 그 보다 더 중요하며 더욱 부담되었던 <교육저널> 마감에 찌들어있었고, <시사IN>은 하필 그 때 2기 인턴기자를 모집공고를 띄웠다.
12월 15일 월요일 마감. <시사IN> 인턴에 지원하는 목적은 매우 소박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쓰는 법 연습하기. 그리고 일단은 마감에 맞추어 원서 지원해보기. 무엇보다도 도망가지 않기. 캬~ 완벽해! 그런데 '원서 넣고 평정심 유지하기' 요 항목을 넣지 않았던 것은 역시나 경험 부족 탓이었다. 대학 5학년 만에 인턴 처음 지원해 보는 1人은 이제 이 문제로 흔들리는 일상을 겪게 된다.
나름 붙어도 문제였다. 밀린 취업 준비를 한꺼번에 해야 하느라 이번 방학에 할 일들이 무진장 많기 때문이다. 일단 토익 점수부터 따야하고. 글쓰기 스터디. 한국어능력시험. 겨울방학까지 해 주기로 약속한 과외. 덤으로 통계학이랑 액셀도. 때문에 학원도 알아보고 방학 중의 빡빡한 일정을 한껏 세워놨으나, 내 삶에 덜컥 던져진 돌 이놈의 인턴! 계획쟁이들은 돌발상황이 발생하면 상당히 대처가 미숙하고 스트레스 받는다. 저 놈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데, 내 맘대로 되지 않는 놈 아니던가. '어차피 떨어지니 김칫국 마시지 말자'라는 주문이 그나마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치만 떨어지는 건 왠지 슬프니, 1차는 붙고 2차에서 떨어지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대 이름은 김칫국의 제왕.
구원투수는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다름아닌 '일'. <교육저널> 발간이 꼬이기 시작하면서, 여기에 all-in 해야만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내가 이 글을 쓰지 않으면 다른 저널 친구들의 졸업논문이 위기다!! 교육저널 발간이 늦어지면 우리 계약금은!!! 강력한 위기감에 내가 글을 쓰는 건지, 글이 나를 쓰는 건지 모를 날밤들이 지속되니 잡념덩어리조차 잡념이 들 틈이 없다. 가장 골치아팠던 글을 완성하고 나니, 오후 1시. 지원마감은 오후 5시.
인턴은 목적은 훨씬 더 소박해져 '일단 원서 내고보기'로 압축되었다. 자소서와 더불어 자기가 쓴 글 2편도 내야 하는데, 선택이 만만치 않다. 글이...좀 많더냐 -_-; 질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내가 쓴 <교육저널>글들은 거의 인터뷰거나 20대의 독특한 시각이 들어갔다기보다는 책상머리글. 열심히 뛴 흔적이 있는 가장 마음에 드는 글은 친구와 공동 집필한 거라, 친구 허락 없이 그냥 내고 싶지는 않았다. 최근 쓴 글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하필 또 시사IN 기자의 블로그 <독설닷컴>에 기고한 <총학생회 선거> 글이었지만, 인턴을 위해 기고했다는 인상을 주기 싫어서 이것도 OUT. 마감시간을 향해 시계바늘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게 마치 시한폭탄 카운트다운 같았다. 결국 블로그의 글 아무거나 슥 긁어서 그대로 제출해버렸다. 교정도 없이. 하아. 인간은 28시간 연속 글쓰기를 할 수 있구나. 한숨 돌리고 시계를 보니, 시간은 4시 58분.
마감은 알고보니 6시까지였다.
-_-;;;
2부. 어느 긴 하루
마감과 인턴지원 이후 뻗어자느라 생활리듬이 또 꼬였다. 그리고 후유증이 며칠을 갔다. 그러는 사이 인턴도 잊어버린듯 햇다. 1차 서류전형 합격자 발표가 날 19일 금요일 당일, 나에게 중요한 건 간만에 만난 친구와의 밥 약속. 역시나 간만에 만나는 후배와의 술 약속. 한참 떠들다 3시. 언뜻 생각나 휴대폰을 보니 문자가 안 왔다. 에이 떨어졌나 보다. 그리고 하던 수다 마저 계속. 머릿속에는 밥약속과 술약속의 뜨는 시간 무엇을 할 것인가가 주된 관심사.
오후 5시. 카페를 나왔을 때 문자가 왔다. '언니 우리 둘다 붙었다 ㅠㅠ' 동아리 후배의 문자. 어라라? 기분은 좋다. 그래도 글 고르는데 막막해서 돌린 설문 문자에 답해준 사람들에게 감사문자를. 집에 들어와서 <시사IN> 홈페이지를 확인해본다. 20명 중에 새겨진 뚜렷한 내 이름. 메일주소. 그 날은 기분이 둥실둥실. 메신저로 재호오빠에게 특훈받은 자기소개서 요령 통했구나. 일단 누군가 이를 알아주었다는 기쁨에 한없는 미소가 퍼졌다.
큰일났다. 스터디가 손에 안 잡히기 시작했다. 과외도. 어차피 인턴 되고 나면 하지 못할 일들. 물론 4배수이니 떨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아니 붙더라도 지금 당장 하고 있는 일은 열심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인턴 결과에 대해서는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무심할지어니. 그러나 정작 나는 이성으로 비관하고 의지로서 낙관하라는 격언을 엉뚱한 데 실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면접 준비를 한 것은 아니다. 사실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 지도 전혀 몰랐다. 글쓰기 아카데미 숙제가 다시 쏟아져나오면서 그거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잘 될리가 없다. 이도저도 어영부영한 날들이라, 면접 날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결과가 어쨌거나 확실하게 결론이 날 테니까 말이다. 실은 인턴 공고 때부터 불안해지기 시작한, 계획쟁이의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평온한 일상이. 계획쟁이에게 가장 스트레스받는 게 뭔지 아나? 그건 플랜 A, B가 병존한다는 사실이다. ㄱ-
12월 22일 면접 당일. 전날 숙제하느라 늦잠잤고, 미용실에서 머리를 쫙쫙 펴느라 더 늦었다. 그러나 생머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면접에 뭘 준비해야 할 지 모를 내가 아는 유일한 준비는 이것뿐 -.-; 지하철 안에서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네비게이션을 돌렸다. 결국 서울역에서 내려 독립문까지 택시를 탔는데, 아슬아슬하게 도착. 휴우 모든 면접의 기본은 시간이거늘 ㅠㅠ 안도와 자책에 얼이 빠져 있는데, 그 때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익숙한 얼굴이 들어와서, 화들짝 놀랐다. 그 은갈치양복은 뭡니까.
20명의 1차 합격자 가운데 아는 사람이 둘이나 있다. 학교의 힘인가 새삼 실감. 뭐하고 살았는지 서빙이 몸에 밴 지원자 하나가, 마치 스태프마냥 다른 지원자들에게 접대하는 만화 같은 일이 있어서, 살짝 마음이 느슨해졌다. 기자님 둘의 만담을 보고,
면접은 4인 1조. 약 30분씩 진행되었다. 남문희 편집국장, 김은남 사회부 기자, 교열팀장님이 면접을 봤다. 문제는 그렇게 까다롭고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왜 기자를 지원하나? 20대를 위해 쓰고 싶은 기사는? 올 해의 인물을 선정해봐라. 나름 막힘없이 술술 대답을 잘 했다. 내 옆 사람들도 다 대답 잘했지만. 글쓰기 아카데미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이 떠오른다. "기자 지망생들 특징이 뭔 줄 알아요? 다들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이란 점입니다. 기자 치고 자살하는 사람 별로 없지요. 아 물론 평균수명은 좀 짧습니다."(웃음)
'붙었다'는 느낌은 없었다. 허나 '망했다'는 절망감도 밀려오지 않았다. 이런 면접은 처음이라 얼떨떨했다. 생각해보니 '붙었다'고 필이 온 면접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대부분 면접에서 망했다고 느끼며 울고 불고 난리치면 붙는다는 민망한 경험이 몇 번 있긴 했지만. 뭔가 새로운 기분이 떨떠름했다. 이런 기분 잊는데는 술이 최고지. 게다가 치킨까지 공짜로 사준댄다. 먹자 먹어 인턴은 안 되도 먹는 건 남는 거다 >_<
그렇게 오후 3시부터 오후 8시까지 술을 마셨다. 이른바 면접 뒷풀이. -_-;;; 인솔자의 말을 잘 듣는 착한어린이답게, 사람들과 번호도 교환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면서 노니까 또 기분은 유쾌해졌다. 같은 직업 준비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만나서 얘기한 건 드문 일이라 색다른 경험이었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나는 분명 인솔자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는데, 중간에 사람들이 다 가 버려서, 어느덧 그의 코앞에 앉아있다.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이 사람이 주는 폭탄주를 마시고 있는 걸까. 음. 술자리 중간에 그가 한 말이 귀에 아린다.
8시에 도망쳐나왔다. 사실 남자친구 생일인데 너무 늦게 나온 것이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에 혼자가 되니까 왠지 우울했다. 가다가 두 번이나 넘어졌는데, 결코 취해서가 아니라, 요즘들어 발목이 약해져서 그런거다. 남자친구 만나서 상당한 어리광을 부렸더니, 후일 그건 주정이었노라고 진술한다. 이봐.
12시 반. 집에 들어가자마자 생각할틈도 없이 그냥 잠들었다. 원래 기분이 이런 것인가. 하루가 참 길다고 느껴졌다.
3부. 황금분할
깨고 나니 속이 영 울렁울렁하다. "언니 나 붙었다 ㅠㅠ" 후배의 반가운 문자가 왔다. 더불어 전화가 안 왔으니 알게 된 나의 불합격소식도. 게시판에 이름 없는 것보다는 더 괜찮은 확인이었다. 살짝은 우울했지만, 후배의 합격은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친구는 붙을 거라고 확신했다.
메신저로 단기특강 받은 취업용 자기소개서 작성요령을 되새겨본다. 중요한 건 가치관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실한 그림을 그려주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은 정작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지닌 사람인지를 선명하게 밝히고, 그 가치관 실현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하는 과정에 스펙이 끼어들 뿐이다. 그리고 그 가치관이 지원하고자 하는 회사와 어떤 점에서 맞닿아 있고. 회사에서 나는 나의 가치관을 어떻게 실현하겠는가.
나는 어디서나 튀는 사람이었고, 가치관도 늘 확고한 축에 든다고 평가받았었다. 그런 것들과 적당한 운이 더해져 1차 500여 명중 20명 안에는 들 수 있었다. 그런데 면접장에서 그 20명을 모아놓으니, 나는 전혀 튀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냥 전형적인 기자준비생이로구나.아직은 나만의 edge가 없다. 면접장에서 깨달은 것이었다.
이 후배를 포함해서, 붙은 사람의 면면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 친구는 글솜씨와 사회를 보는 눈이 뛰어나면서도, 다른 기자준비생들에게는 잘 없는 아주 독특한 감수성이 있다. 면접에 합격한 다른 이들도 술자리에서 이야기 해 봤을 때, 굉장히 멋있고 뛰어나다기보다는, 어떤 전형성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사람들이다. 결과가 너무 당연해서 아쉬움은 들 틈도 없었고, 다만 심리적 후유증은 한나절, 신체적 후유증은 하루 갔다. 90% 까칠하고 10% 자상한 모 기자가 때마침 전화한다.
다음 날부터 역시 아카데미의 무지막지한 숙제가 또 다시 쏟아지기 시작햇다. 이번에는 집중도 잘 된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여라. 나의 edege를 채우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배워야 할 거 투성이라, 그냥 쑥쑥 빨아들이는 맛에 살고 있다. 오랫만에 맛보는 감각에 몸은 피곤해도 상쾌하다. 일상은, 플랜 A 대로 잘 돌아가고 있다.
생각해보니 애초의 계획은 다 이루었다. 정말로 1차에서 붙었고, 2차에서 떨어졌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써 보는 연습을 했고, 처음으로 마감시간에 맞춰서 접수에 성공했다. 면접도 시간까지 여유있게 갔으면 좋으련만 -_-;; 이런 반성과 더불어, 면접이 어떤 것인지나마 어렴풋이 확인했다. 술과 치킨도 얻어먹고 사람들도 만나고. 심지어 지금 원래 해야했던 글쓰기와 영어공부마저 잘 된다. 다만 일주일 사이에 생긴 자신감의 기복에 조금은 어지러운듯도 하지만, 평균은 찾은 듯 하다. 1차 합격자 안에는 들었지만, 그 안에서는 참 개성없이 묻혔지. 적당히 자신감을 갖되, 겸손함을 유지해라.
돌발상황이 계획을 방해하는 일은 많았지만, 돌발상황에 휘말린 끝에 계획이 다 완수되는 일도 처음이다. 뭐 이전에도 있었지만 내가 발견 못 했었을 수도 있겠다. 계획이란 일정의 정교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좌충우돌해 가는 가운데 완수할 수 있다는 점을. 어쨌거나 결과는 완벽하다. 자신감, 겸손함, 경험, 부족한 부분을 공부해야 할 기회. 이건 그야말로 황금분할!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실실거리고 다니는 요즘이다.
인턴 합격한 친구들 6명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멋진 활약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 by 은하 | 2008/12/28 03:50 | 생활 | 트랙백 | 덧글(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