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9일
양아치와 이불공주
간만의 시골 양아치 출신 경찰 이야기.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그는 '학교폭력'이니 '교실붕괴'니 하는 말에 코웃음친다. 별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썽피우는 학생은 언제나 있었댄다. 그리고 70년대 어느 시골마을에서는 본인이 그 장본인이었으니 누구보다 더 잘 안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책가방은 집어던지고 싸움질만 하고 다녔다. 고등학교도 한 번 떨어지고 재수끝에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역시나 공부를 할 리가 없다. 수업시간, 싸움 일으키지 않고, 교실 뒷구석에 앉아 무게잡고 무협지나 보고 있으면 교사들이 더없이 고마워했다고 한다.
그런 그도 교과서를 펼쳐들 수밖에 없었던 과목이 딱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축산. 악명높은 호랑이 선생. 그리고 아무리 양아치더라도 60살 먹은 노인네를 패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이 통용됐던 순정한 시대였다. 또 다른 하나는 담임선생님 시간. 헌데 그는 담임선생님의 과목이 뭐였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수업시간에 자기 과목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놈들아. 나중에 최소한 신문은 보고 살아야 할 거 아냐."
그는 한자만 가르쳤다. 그 때마다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신문은 볼 줄 알아야 한다며 반쯤은 비꼬고 반쯤은 타일렀다. 한자를 쓰는 게 아니라 그렸다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그도 수업을 들었다. 정말 신문을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까. 선생님이 카리스마 있었던 걸까. 혹시 무협지를 보다 수월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인가.
졸업식날, 졸업식과 무관하게 친구들이랑 술을 퍼마시느라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얼큰하게 돌던 술이 깰 무렵, 한 친구가 말했다. 졸업식인데 그래도 학교는 가 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담장 넘어 학교에 가 봤는데 역시나 아무도 없다. 그저 빈 교실에서 허공만 바라보며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었는데, 문이 드르륵 열린다. 담임선생님이다.
"으이구, 졸업식날이라고 학교는 왔냐. 니네 졸업장 ○○ 애들이 가져갔다. 어여 거기 가 봐."
이것이 그가 기억하는 담임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한다.
그는 결국 졸업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담임선생님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제자 녀석이 졸업하고 신문은 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신문만 읽는 것은 아니다. 천하의 불량학생이 경찰이 됐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번듯한 가정이 있고, 나름 번듯하게 살아간다. 이 모든 삶을 '신문'으로 요약했던 선생님의 혜안에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한참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공고와 상고는 그래도 유망했지만 농고는 달랐다. 누군가는 엎어져 잠을 자고, 누군가는 무협지를 보고, 누군가는 불안한 꿈에 쫓기면서도 수업을 듣는다. 하지만 졸업하면 대부분은 어느 도시 변두리에서 맨주먹으로 새 삶을 시작하리라. 그리고 당분간은 가난을 벗어나기도 쉽지 않을 게다. 영어와 수학으로 승부를 거는 게임에서 이미 밀려난 그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악착같이 살다보면 나은 내일을 꿈꿀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꿈에만 의지하기에는 세상이 호락호락하지 않다. 닭장같은 공장에서 검은피를 쏟으며 죽어가도 별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배운 것 없는 자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할 곳을 모른다. 그저 성공만을 위해 달려가다간 나락에 빠지기도 쉽다. 이처럼 사람답게 살기 힘든 정글에서, 그나마 잘 살아남는 법은 다른 게 아니다. 주어진 환경이나마 잘 이해하고. 자신들을 이용해먹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눈을 부릅뜨는 것. 그리고 세상돌아가는 소식도 알고, 제 목소리도 낼 수 있다면, 더 나은 내일이란 조금은 더 빨리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지배당하지 않는 법. 담임선생님이 가르치고자 한 것은 단순히 한자가 아니었다. 신문 읽는 삶이란 보다 현명한 시민으로서 자립하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불량학생이 무협지를 덮고 공책을 꺼내든 것도, 진정으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진심이 와 닿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대하고 어떻게 살 지 몰라 막막했을 때, 신문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니, 한 사람이 뿌린 작은 씨앗의 힘이 놀랍기만 하다.
요즘 신문은 대부분 순 한글로 나온다. 한겨레가 창간 직후부터 지금까지 한글만을 고집하는 이유도 저학력자들도 쉽게 신문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그래도 나은 내일이 한 발짝씩 다가온 것도 같다. 이제 중학생 정도면 신문을 읽을 수 있다. 노동법이 있어도 있는지도 몰라서 죽을 확률도 상당히 낮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밀려난 사람들은 존재한다. 더욱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문은 점점 좁아져만 간다. 70년대 시골 불량학생이 있던 자리, 21세기 학교에는 이불공주가 있고 한다. 학교에 이불을 아예 싸들고 와서 만 자는 학생들. 깨워도, 혼내도 무표정한 얼굴로 도로 잠이 들고 마는 그녀들 앞에, 교사들은 혼낼 기력도 사라진다고 말한다. 반항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기력이기에. 그리고 이불공주들이 무기력한 이유를 사실 다 알고 있기에.
이불공주들은 정말로 잠이 모자르다. 0교시에 야자에 학원에.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수업은 수업의 질을 떠나서 고문이라고 어느 칼럼니스트가 말했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불공주들에게 고문을 견뎌내야 할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역시나 영어와 수학으로 승부를 거는 경쟁에서 밀려난 그녀들. 조금이라도 더 공부해서 조금이라도 높은 배치표의 대학을 간다 할지언정. 크게 다를 것 없는 불안한 미래. 그녀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불공주들의 잠은 안쓰럽지만, 잠이 그저 미래에 대한 체념적 수용을 의미한다면 이보다 처참한 일이 또 있을까.
이불공주들도 그 담임선생님이 필요하다. 영단어 몇 개가 아니라, 진정으로 지배당하지 않는 법. 조금이나마 지배체제를 교란시킬 수 있는 법을 전수할 교육. 하지만 더 이상 한자를 몰라서 신문을 못 읽는 세상이 아닌 이상 무엇을 가르쳐야만 할까. 확실한 건 일제고사나. 방과 후 교육이나. 사교육 없는 학교 따위는 분명 답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세상은 '방과 후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로만 살아가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 by 은하 | 2009/04/19 00:48 | 발견 | 트랙백 | 덧글(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