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03월 12일
당신의 거부를 응원한다
책을 썼다는 이유로 이리저리 인터뷰에 불려다니는데, 가급적 피하고 있다. 대부분 같이 쓴 친구들에게 넘긴다. 어쩔 수 없이 단체 인터뷰를 하게 된 날에는 하루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히고 우울하기까지 하다. 그도 그럴것이 자취도, 노동도 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현실에 발을 딛은 생생한 분노가 애초에 없었다. 책상머리에서 글을 쓰는 게 드디어 한계가 왔구나를 뼈저리게 느낀 6개월. 내가 아닌 친구들의 글이 세상에 빛을 보게 하기 위해 분량을 채울만한 글을 썼다. 그러니 정작 내 글엔 정말 절실한 분노라고 할 만한 부분은 거의 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내가 이 책의 저자로 불려다니는 게 좀 그렇다.
그나마 내가 '나의 이야기'로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대학에 관한 것이었다. 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캠퍼스 안에서의 극히 좁은 경험만을 가졌던 나로서는 이것만이 실천과 실패 속에 제대로 고민했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내 책에 치열하게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 서울대에만 국한된 이야기, 후배들에게 현재진행중인 이야기, 스스로 정리가 안 된 이야기... 이런저런 이유로 직구 대신 변화구를 던졌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그저 핑계일 것이다. 박제가 된 기억을 억지로 재구성하면서 글을 쓰다가, 어떤 글은 내부 기획회의에서 4번이나 박살이 났다. 그렇게 간신히 완성한 글이 '촛불은 왜 횃불이 되지 못했나'였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고대생의 자퇴 자보를 봤다. (참고: 길 잃은 88만원 세대, 온 몸으로 저항선언) 마음은 아팠지만 속이 시원했다. 분노가 담겨있는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그래, 원래 쓰려고 했던 게 저런 내용이었지. 얼마다 책을 무디게 썼는지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글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 말을 해 주었다는 사실이 시원했고 , 누군가가 대학생활을 통해 느꼈을 참담함이 떠올라 분노했다. 어쩌면 이 글이야말로 최초로 올린 횃불일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 간판이란 '친구들을 넘어뜨린' 훈장으로 얻은 브랜드였다. 이 브랜드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대한 불안감'도 덤으로 얻게 됐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지성의 전당은 이러한 불안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았다. 대학은 우리가 넘어뜨린 친구둘의 불행에도, 넘어뜨리지 못한다면 넘어진다는 불안감에도 무관심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강요되는 게임이라는 데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에 학생들을 원하지 않는 영어수업으로, 이중전공으로 몰아넣으면서, 그것이 발전이라 강요했다. 캠퍼스를 기업관련 시설로 채우면서 그것을 '글로벌'이라 자랑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은커녕 대학이란 곳이 원래 뭐하는 곳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시대에 대한 성찰도, 진리에 대한 열정도 없이 각종 순위 차트에서 보다 앞서기만을 바라는 대학은 결국 상품의 하나에 불과하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대학이 자신들이 상품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내가 더 괜찮은 상품'이라는 걸 과시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꿈도 희망도 펼치기 어렵거니와, 대학과 무관하게 자력으로 펼친 꿈과 희망은 내가 그 대학의 일원이란 이유로 상품의 장식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고대가 김연아를 키웠다는 전설적인 광고의 문구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대는 법인화를 미끼로 정부여당의 세종시 제2캠퍼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고, 연세대는 지방선거 일정에 발맞춰 학생도 없는 송도캠퍼스를 열었다. 이화여대와 부산대의 거대 쇼핑센터는 학교(학생 아님)의 자랑이 됐고, 건국대에서 독문학과 불문학을 배우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래놓고서 대학 총장들은 등록금이 너무 낮으면 대학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벌인다. 배움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배움의 공간을 강탈당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학에서말이다. 이런 곳에서 20대가 절망을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
그 분노와 절망이 여기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이 자보를 쓴 이가 용감하다고, 다른 이들은 비겁한 것이냐는 독법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글쓴이의 말대로 선택으로 힘겹고 고난의 길을 걷게 될 사람은 바로 이 친구다. 그리고 이 친구를 선택으로 내몬 것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부당한 구조다. 대학 내에서 비싼 등록금을 물며 졸업요건을 채워가는 일이나, 자퇴생의 신분을 감수하거나 극단의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사회와 우리 사이 전선을 그어야 한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당연한 권리로 인생에 필요한 것을 대학에서 배워가는 것이므로.
가장 먼저, 결코 쉽지 않았을 횃불을 든 당신을 응원한다. 내가 들지 못한 횃불이었기에 나의 부끄러움만큼 큰 응원을 보내고 싶다. 상아탑이 아니라 상아파는 쇼핑몰이 된 대학에서 꿈과 희망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 꿈을 다시 찾는 방법은 그 척박한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이 돼야 한다는 것, 당신 덕분에 다시 생각이 났다. 그 분노의 불길 결코 꺼트리지 않겠다.
그나마 내가 '나의 이야기'로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대학에 관한 것이었다. 학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캠퍼스 안에서의 극히 좁은 경험만을 가졌던 나로서는 이것만이 실천과 실패 속에 제대로 고민했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내 책에 치열하게 담아내는 데 실패했다. 서울대에만 국한된 이야기, 후배들에게 현재진행중인 이야기, 스스로 정리가 안 된 이야기... 이런저런 이유로 직구 대신 변화구를 던졌다. 그리고 그 이유의 대부분은 그저 핑계일 것이다. 박제가 된 기억을 억지로 재구성하면서 글을 쓰다가, 어떤 글은 내부 기획회의에서 4번이나 박살이 났다. 그렇게 간신히 완성한 글이 '촛불은 왜 횃불이 되지 못했나'였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어느 고대생의 자퇴 자보를 봤다. (참고: 길 잃은 88만원 세대, 온 몸으로 저항선언) 마음은 아팠지만 속이 시원했다. 분노가 담겨있는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을 찔렀다. 그래, 원래 쓰려고 했던 게 저런 내용이었지. 얼마다 책을 무디게 썼는지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는 글이었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이 말을 해 주었다는 사실이 시원했고 , 누군가가 대학생활을 통해 느꼈을 참담함이 떠올라 분노했다. 어쩌면 이 글이야말로 최초로 올린 횃불일지도 모른다.

내가 겪은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학 간판이란 '친구들을 넘어뜨린' 훈장으로 얻은 브랜드였다. 이 브랜드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대한 불안감'도 덤으로 얻게 됐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지성의 전당은 이러한 불안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았다. 대학은 우리가 넘어뜨린 친구둘의 불행에도, 넘어뜨리지 못한다면 넘어진다는 불안감에도 무관심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 강요되는 게임이라는 데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에 학생들을 원하지 않는 영어수업으로, 이중전공으로 몰아넣으면서, 그것이 발전이라 강요했다. 캠퍼스를 기업관련 시설로 채우면서 그것을 '글로벌'이라 자랑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고민은커녕 대학이란 곳이 원래 뭐하는 곳인지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시대에 대한 성찰도, 진리에 대한 열정도 없이 각종 순위 차트에서 보다 앞서기만을 바라는 대학은 결국 상품의 하나에 불과하다. 가장 절망적인 사실은 대학이 자신들이 상품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부끄러워하기보다는 '내가 더 괜찮은 상품'이라는 걸 과시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이다. 그 속에서 꿈도 희망도 펼치기 어렵거니와, 대학과 무관하게 자력으로 펼친 꿈과 희망은 내가 그 대학의 일원이란 이유로 상품의 장식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고대가 김연아를 키웠다는 전설적인 광고의 문구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서울대는 법인화를 미끼로 정부여당의 세종시 제2캠퍼스와 협상을 벌이고 있고, 연세대는 지방선거 일정에 발맞춰 학생도 없는 송도캠퍼스를 열었다. 이화여대와 부산대의 거대 쇼핑센터는 학교(학생 아님)의 자랑이 됐고, 건국대에서 독문학과 불문학을 배우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그래놓고서 대학 총장들은 등록금이 너무 낮으면 대학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벌인다. 배움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배움의 공간을 강탈당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학에서말이다. 이런 곳에서 20대가 절망을 배우지 않을 수 있을까.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
그 분노와 절망이 여기서 이렇게 외치고 있다. 이 자보를 쓴 이가 용감하다고, 다른 이들은 비겁한 것이냐는 독법은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글쓴이의 말대로 선택으로 힘겹고 고난의 길을 걷게 될 사람은 바로 이 친구다. 그리고 이 친구를 선택으로 내몬 것은 우리 모두가 짊어지고 있는 부당한 구조다. 대학 내에서 비싼 등록금을 물며 졸업요건을 채워가는 일이나, 자퇴생의 신분을 감수하거나 극단의 선택지만을 강요하는 사회와 우리 사이 전선을 그어야 한다.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들이지 않고 당연한 권리로 인생에 필요한 것을 대학에서 배워가는 것이므로.
가장 먼저, 결코 쉽지 않았을 횃불을 든 당신을 응원한다. 내가 들지 못한 횃불이었기에 나의 부끄러움만큼 큰 응원을 보내고 싶다. 상아탑이 아니라 상아파는 쇼핑몰이 된 대학에서 꿈과 희망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 꿈을 다시 찾는 방법은 그 척박한 공간을 재구성하는 일이 돼야 한다는 것, 당신 덕분에 다시 생각이 났다. 그 분노의 불길 결코 꺼트리지 않겠다.
# by 은하 | 2010/03/12 15:41 | 우리시대 | 트랙백 | 덧글(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