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7일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새로 쓰는 가족 이야기 발제)
흔들리는 '가족'에 관한 책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주의 공동체에서 칼럼식으로 이 주제에 관해 기고한 것들을 엮은 것이죠. 여기서 흔들리는 가족은 흔히 언론에서 말하는 '위기의 가족'이 아니라 가족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부터 출발하여 '함께 사는 공동체'에 대해서 논해봅니다.(그 공동체에는 전통적 가족이 포함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죠.)
꽤 재밌게 쓰여졌습니다. 400페이지 가량 되지만 읽기도 쉽구요. 20대와 50대 필진이 주축이 되어 쓴 것인데, 3,40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가족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기에 좋은 책인듯 합니다. 경험담 위주라 '깊이가 얕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는데...여기 실린 글들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좀 불만스럽네요.
가족과 가부장제에 관해서라면 '남자의 탄생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와 함께 비교해서 읽어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12월 2일날쯤에 읽어야지;;
1. 무너지는 환상, 뛰쳐나온 여우와 토끼들
사랑이란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지만 연애는 상당히 '역사적'입니다. 특정한 시대와 사화가 연애의 양상을 결정해왔고, 심지어 특정한 연애는 금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근대의 동성애처럼 말이죠. 남녀간의 연애 끝의 결혼, 그로 인한 '애정 가정'의 탄생이라는 시나리오 역시, 이런 연애의 역사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근대적 산물이라 합니다.
근대인들은 봉건적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지만, '개인'이라는 파편화된 존재로 갈갈이 찣어졌습니다. 이러한 찣어짐을 메울 수 있도록 '연애'는 부각되었고 연애를 통한 결혼과 단란한 핵가족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 단란한 핵가족은 개인의 애정 욕구와 더불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요소와 맞물려 '스위트 홈(sweet home)'이라는 환상적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한마디로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
그런데 '개인'의 발견에 대한 욕구와 애정으로 똘똘 뭉친 줄로 알았던 스위트 홈은 사실 빈 껍데기였다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틀은 이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균열음을 내며 무너져 갑니다. 망각된 개인들은 아예 새 틀을 짓자고 아우성이구요. 이 책은 그런 균열음과 아우성 관한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역설이 벌어졌을까요? 근대 애정 가정의 허구. 그것은 이미 환상의 시작부터 문제를 안고 출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이라니, 이건 누구의 시선입니까. 이들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호랑이의 시선일 따름입니다. 가부장제라 명명된 이 틀을 넘어서 여우와 토끼들은 이제 '자아'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과연 자아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혼자 남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는걸까요.
2.아버지의 부재와 모성공동체 비판(20대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중심으로)
이 책에 등장한 가정 파열의 중심에는 항상 아버지가 존재합니다. 봉건적이었던 할아버지, 화목한 가족을 억지로 실현하려 했던 아버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가족들과 소통 못 하는 아버지...중심아닌 중심부에서 머물며 가족 성원들에게 힘겨움만 주는 그들입니다
반면 어머니와 딸은 놀랍게도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끈끈한 자매애이건, 우정이건, 조금은 건조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이건, 그녀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은 적어도 '아버지/남편'과의 그것보다 낫습니다. 여성 혹은 모성이란 끈 덕분일까요.
이 책에 드러난 대안 공동체도 이러한 모성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간의 동거,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아이를 공동육아 하면서 사는 공동체, 남성 없이도 홀로서기...끊임없이 자매애를 강조하며, 가부장적 폭력성에서 벗어난 따듯하고 쿨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안 공동체는 유난히 '아이'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결혼은 싫어도 아이는 원한다! 반대의 경우는 매우 적은 편이네요.
그러나 이런 아이, 자매에 대한 집착이 결국 '여성은 모성이다'라는 명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라도 여성은 독립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대안 공동체에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문제는 문제의 '아버지'들입니다. 그들 역시 가부장 제도에 맞게 길들여졌고 그에 따라 살다보니 이제 골칫덩이 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대안 공동체에 그들은 소외되어 있지요. 변하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뛰쳐나가는 그녀들 사이 화해의 접점은 이미 없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버지의 악마화를 통한 모성의 강화...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대안을 찾는 게 아닐런지요.
3. 혈족주의 너머 그리고 함께 살기
이 책의 부제가 말하듯 결국 가족 논의는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와 귀결됩니다. 당연히 가족이랑 살아야지라는 말을 부정하고 같이 살 '새로운 주거 공동체'를 그녀들은 끊임없이 찾으려 노력합니다. 이것 자체로 혁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들의 대안 공동체는 일단 핏줄부터 뛰어넘으려 합니다. 혈족에 수반되는 위계적 사랑이 아닌 평등한 우정을 나누고,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희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끈적끈적한 집착과 맹목적 요구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배려, 존중, 때로는 쿨하게 떠나보내는 것까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영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머물다 가는 손님과의 관계맺기가 시도됩니다.
쿨합니다. 반면 한겨레 21에 실린 이런 기사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쿨’은 동시에 집단이라는 보호막이 해체되고 노동이 유연화 되어가는 요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환상일지 모른다. 수면 위에선 우아한 미소를 흘리지만 물 밑에선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대야 하는 오리배처럼, 타인에게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삼키는 눈물은 얼마나 쓰라린가. 그래서 ‘쿨’은 자신을 종신토록 고용해주는 직장이나 영원히 감싸주는 집단 또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인들이 무의식&의식적으로 발명해낸 감정의 조절 양식으로도 읽힌다.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도 않고 그래서 상대방을 포용하지도 못하면서 고통을 그냥 견디는 ‘개인’
‘쿨’을 이처럼 ‘뜨겁게’ 설명한 끝에 가지는 안쓰러움이다.
-이주현&최혜정 기자- <한겨레21 제 478호 표지이야기 ‘나 지금 쿨~하니’> 2003.10.9
4. 바로 서기
'함께 살기'란 결국 삶에서 '바로 서기' 위한 방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가족이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 아래 개인들의 바로서기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새로운 '함께 살기' 방편을 탐구할 때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들의 고민-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는 꽤나 의미있는 고민입니다. 결혼, 이혼, 동거, 별거, 출산, 입양, 가족, 대안공동체...그리고 그 속에 담긴 탈혈족주의담론, 모성적 성격,혹은 철저한 개인화...새로운 공동체의 결성, 혹은 전통적 가족의 복원 또는 재구성
다양한 대안들이 복잡한 담론속에 얽혀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해야 '바로 설 수 ' 있을 지 함께 토론해 봅시다.
여담이지만 난 소위 페미니즘하면 떠오르는 상상과 달리 굉장히 안 어울리게 가정적(?)이다.
가정애호적 혹은 가정집착적이라고 해야 하나...어쨌든ㅡㅡ;;;
내 인생에 결혼을 안 할 거라는 것을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심지어 유치원때도) 우리집이 역시 그닥 스위트 홈이 아니었음에도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아직도 덜 깨진 거 같다;;;
퀴리부부의 가족같은(생각해보니 애를 시아버지가 키워주셨다.ㅡㅡ;;) 내 미래의 가족이라는 몽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현실을 모르는 소녀의 로망인 것인가, 나름대로 맏딸이라 애정과잉의 산물인 것인가.--;;
사실 한겨레21의 '쿨'에 관한 저 기사에 몹시 공감한 것도, 내가 옛날의 펄펄 끓는 끈적끈적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같은 사람에게도 페미니즘이 가능할까 고민중이다.
꽤 재밌게 쓰여졌습니다. 400페이지 가량 되지만 읽기도 쉽구요. 20대와 50대 필진이 주축이 되어 쓴 것인데, 3,40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가족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기에 좋은 책인듯 합니다. 경험담 위주라 '깊이가 얕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는데...여기 실린 글들은 대동소이하다는 점이 좀 불만스럽네요.
가족과 가부장제에 관해서라면 '남자의 탄생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와 함께 비교해서 읽어보는 게 좋을 거 같군요. 12월 2일날쯤에 읽어야지;;
1. 무너지는 환상, 뛰쳐나온 여우와 토끼들
사랑이란 인간 본연의 감정이라지만 연애는 상당히 '역사적'입니다. 특정한 시대와 사화가 연애의 양상을 결정해왔고, 심지어 특정한 연애는 금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령 근대의 동성애처럼 말이죠. 남녀간의 연애 끝의 결혼, 그로 인한 '애정 가정'의 탄생이라는 시나리오 역시, 이런 연애의 역사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근대적 산물이라 합니다.
근대인들은 봉건적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지만, '개인'이라는 파편화된 존재로 갈갈이 찣어졌습니다. 이러한 찣어짐을 메울 수 있도록 '연애'는 부각되었고 연애를 통한 결혼과 단란한 핵가족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 단란한 핵가족은 개인의 애정 욕구와 더불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요소와 맞물려 '스위트 홈(sweet home)'이라는 환상적 이미지가 탄생합니다. 한마디로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
그런데 '개인'의 발견에 대한 욕구와 애정으로 똘똘 뭉친 줄로 알았던 스위트 홈은 사실 빈 껍데기였다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 틀은 이제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해 균열음을 내며 무너져 갑니다. 망각된 개인들은 아예 새 틀을 짓자고 아우성이구요. 이 책은 그런 균열음과 아우성 관한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이런 역설이 벌어졌을까요? 근대 애정 가정의 허구. 그것은 이미 환상의 시작부터 문제를 안고 출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자식들이라니, 이건 누구의 시선입니까. 이들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호랑이의 시선일 따름입니다. 가부장제라 명명된 이 틀을 넘어서 여우와 토끼들은 이제 '자아'를 찾으려고 합니다. 그들은 과연 자아를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혼자 남은 호랑이는 어떻게 되는걸까요.
2.아버지의 부재와 모성공동체 비판(20대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중심으로)
이 책에 등장한 가정 파열의 중심에는 항상 아버지가 존재합니다. 봉건적이었던 할아버지, 화목한 가족을 억지로 실현하려 했던 아버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가족들과 소통 못 하는 아버지...중심아닌 중심부에서 머물며 가족 성원들에게 힘겨움만 주는 그들입니다
반면 어머니와 딸은 놀랍게도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끈끈한 자매애이건, 우정이건, 조금은 건조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이이건, 그녀들 사이의 소통과 공감은 적어도 '아버지/남편'과의 그것보다 낫습니다. 여성 혹은 모성이란 끈 덕분일까요.
이 책에 드러난 대안 공동체도 이러한 모성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성들간의 동거, 마음에 맞는 친구끼리 아이를 공동육아 하면서 사는 공동체, 남성 없이도 홀로서기...끊임없이 자매애를 강조하며, 가부장적 폭력성에서 벗어난 따듯하고 쿨한 관계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대안 공동체는 유난히 '아이'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옵니다. 결혼은 싫어도 아이는 원한다! 반대의 경우는 매우 적은 편이네요.
그러나 이런 아이, 자매에 대한 집착이 결국 '여성은 모성이다'라는 명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안타깝습니다. 어머니가 아니라도 여성은 독립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대안 공동체에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문제는 문제의 '아버지'들입니다. 그들 역시 가부장 제도에 맞게 길들여졌고 그에 따라 살다보니 이제 골칫덩이 호랑이로 전락했습니다. 대안 공동체에 그들은 소외되어 있지요. 변하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뛰쳐나가는 그녀들 사이 화해의 접점은 이미 없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아버지의 악마화를 통한 모성의 강화...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대안을 찾는 게 아닐런지요.
3. 혈족주의 너머 그리고 함께 살기
이 책의 부제가 말하듯 결국 가족 논의는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와 귀결됩니다. 당연히 가족이랑 살아야지라는 말을 부정하고 같이 살 '새로운 주거 공동체'를 그녀들은 끊임없이 찾으려 노력합니다. 이것 자체로 혁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들의 대안 공동체는 일단 핏줄부터 뛰어넘으려 합니다. 혈족에 수반되는 위계적 사랑이 아닌 평등한 우정을 나누고, 더 평등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희구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끈적끈적한 집착과 맹목적 요구가 아닌, 상대방에 대한 배려, 존중, 때로는 쿨하게 떠나보내는 것까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영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머물다 가는 손님과의 관계맺기가 시도됩니다.
쿨합니다. 반면 한겨레 21에 실린 이런 기사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쿨’은 동시에 집단이라는 보호막이 해체되고 노동이 유연화 되어가는 요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자 환상일지 모른다. 수면 위에선 우아한 미소를 흘리지만 물 밑에선 부지런히 페달을 밟아대야 하는 오리배처럼, 타인에게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속으로 삼키는 눈물은 얼마나 쓰라린가. 그래서 ‘쿨’은 자신을 종신토록 고용해주는 직장이나 영원히 감싸주는 집단 또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현대인들이 무의식&의식적으로 발명해낸 감정의 조절 양식으로도 읽힌다.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도 않고 그래서 상대방을 포용하지도 못하면서 고통을 그냥 견디는 ‘개인’
‘쿨’을 이처럼 ‘뜨겁게’ 설명한 끝에 가지는 안쓰러움이다.
-이주현&최혜정 기자- <한겨레21 제 478호 표지이야기 ‘나 지금 쿨~하니’> 2003.10.9
4. 바로 서기
'함께 살기'란 결국 삶에서 '바로 서기' 위한 방편일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가족이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 아래 개인들의 바로서기를 막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새로운 '함께 살기' 방편을 탐구할 때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녀들의 고민-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는 꽤나 의미있는 고민입니다. 결혼, 이혼, 동거, 별거, 출산, 입양, 가족, 대안공동체...그리고 그 속에 담긴 탈혈족주의담론, 모성적 성격,혹은 철저한 개인화...새로운 공동체의 결성, 혹은 전통적 가족의 복원 또는 재구성
다양한 대안들이 복잡한 담론속에 얽혀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어떻게 해야 '바로 설 수 ' 있을 지 함께 토론해 봅시다.
여담이지만 난 소위 페미니즘하면 떠오르는 상상과 달리 굉장히 안 어울리게 가정적(?)이다.
가정애호적 혹은 가정집착적이라고 해야 하나...어쨌든ㅡㅡ;;;
내 인생에 결혼을 안 할 거라는 것을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심지어 유치원때도) 우리집이 역시 그닥 스위트 홈이 아니었음에도 스위트 홈에 대한 환상은 아직도 덜 깨진 거 같다;;;
퀴리부부의 가족같은(생각해보니 애를 시아버지가 키워주셨다.ㅡㅡ;;) 내 미래의 가족이라는 몽상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건 현실을 모르는 소녀의 로망인 것인가, 나름대로 맏딸이라 애정과잉의 산물인 것인가.--;;
사실 한겨레21의 '쿨'에 관한 저 기사에 몹시 공감한 것도, 내가 옛날의 펄펄 끓는 끈적끈적한 관계를 더 선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같은 사람에게도 페미니즘이 가능할까 고민중이다.
# by 은하 | 2004/11/27 23:22 | 아카데미 | 트랙백 | 덧글(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