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다 만난 이웃

저녁을 먹고 운동을 하러 나갔다. 동네 놀이터에 야외 체육 시설이 설치되어 있어 매우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다만 헬스클럽의 러닝머신처럼 TV가 달려있는 것이 아니니 혼자 묵묵히 운동하기에는 심심할 수 있다. 엄마는 mp3 플레이어를 가져가라고 했지만, 그냥 집을 나섰다. 엄마 카드를 긁어서 미키마우스 mp3 플레이어를 사 놓고도 거의 사용을 하지 않는다. 그럴거면 왜 샀느냐는 지극히 타당한 잔소리가 귀를 찔러오지만, 작동을 못 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죽어도 말 안 하리라.기계치의 제왕 만세

그러나 기왕 나왔으니 30분은 하고 들어가야 할 텐데 지루함을 참아낼 수 있을까 걱정은 앞선다. 최근 체력이 너무 약해져서 조금이라도 운동을 꼭 하자는 생각이다만, 첫 날부터 무너질수야. 헌데 생각보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기계의 리듬대로 움직이는 러닝머신과 달리 자신의 신체가 리듬을 만들어내는 옥외 기구운동의 경우, 보다 움직임에 집중할 수가 있다. 살갗에 와 닿는 가을바람도, 손톱만한 달을 보는 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면 그래도 시간이 차기만을 기다리는 운동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20분이 지났을 때 처음 보는 할머니가 천천히 다가오신다. 공터에 할머니와 20대 여성인 나와 둘, 그리고 침묵. 눈이 딱 마주치면 일단 싱긋 웃어보이자. 앞으로 몇 십분간은 여기서 함께 운동할 사람 아닌가. 이 때 어색함을 먼저 깨는 쪽은 아무래도 연륜이 있는 할머니시다. "밥도 늦게 먹어 소화도 좀 시키려고...", 나는 받는다. "○○ 사세요? 저도 거기 살아요."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으레 그 나이대 어른마냥 부모님의 고향과 성씨를 먼저 물어보시고, 나는 일단은 넉살좋게 답한다. 그 쪽도 충청도구만. 나는 충남인데. 일단 어떤 방식이든지 공통점을 먼저 찾는다. 어머나 성씨도 같구먼. 할아버지 돌림자가 '수'라고 하니까 자기 친정아버지도 그렇다고 은근히 반가워하신다. 세대차이라는걸 확연히 느끼지만 또한 우리 할머니에게도 늘 보이던 모습이라 되려 낯설지 않다.

저기 위 놀이터에 중학생 주제에 낯뜨거운(?) 애정행각을 벌이는 커플들이 있다고 하자, 양심을 비우고 열심히 따라 성토한다. 어머, 이런 무개념 커플들. 은행 다니는데 결혼하지 않는 딸이 있다고 하자, 요즘 결혼은 필수만은 아니라고  적당히 젊은 사람들 입장도 대변해준다. 어느 여배우의 안타까운 죽음 이야기도 나왔다. 이 만한 격차를 떠나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을 남겨준 대단한 배우가 떠났다는 생각을 새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외로웠겠지만. 그 외에도 이런저런. 시계바늘은 무섭게도 빠르게 돌아간다.

재밌으니 매일 나오라는 말씀에 그러려고 노력은 한다고 답했다. 돌아가는 길도 심심하지 않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일정 시간에 운동하는 것도 아니라 다시 만날 기약이 불분명하지만, 뭐 이대로도 좋다. mp3 없이도 심심하지 않게시간을 보낸 것이다. 다음 번에 혹시나 마주할 때의 반가움은 덤, 그렇지 않더라도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꽤나 기분이 좋다.

헬스클럽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설운동장에 나가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일제히 한 방향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간다. 핸드폰과 mp3로 무장한 사람들은 타인이 들어올 틈을 주지 않고, 자신도 타인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명백히 보여주며 각자의 세계를 튼튼하게 구축하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부대끼고 살아야 하는 도시 사회에서 서로 간의 거리 유지란 건 필수적인 일이지만, 지나치게 심해지면 조금은 답답하다.  

일상에서 그 답답함을 가장 많이 느끼는 공간은 엘리베이터이다. 이 좁고 순간적인 공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다는 느낌은 영 불편하다. 거울을 보면서 괜스레 머리를 매만진다. 상대방을 최대한 없는 존재처럼 취급해야 한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 서둘러 나오기 바쁘다. 人間이란 사람사이라는 복수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데, 이처럼 타인과의 접촉 자체가 부담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자기 존재에 대한 배반일까. 그나마 여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감수성에 위안을 받아야 하는걸까.

이 공터에 mp3를 꽂고 나왔다면, 역시나 내 옆에 있었던 이 분을 없는 사람 취급해야 할 텐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또한 그 분도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다. '대화'란 내가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장치인 걸까.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 꽤나 기쁘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참 지나서 생각이 났는데, 이 분은 요즘말로 '타인'이지만, 개념은 남았는데 요즘들어서 어디 적용해서 부르기는 쉽지 않게 되어버린 단어 '이웃' 이었다.

by 은하 | 2008/10/06 01:25 | 생활 | 트랙백 | 덧글(19)

지금 '서울대법대' 강의석 군에게 가장 필요한 것

태환아 너도 군대 가(대학내일)

대학에 입학할 무렵, 대학생활 중 강의실에서 얻어가는 것의 비중은 30%정도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리고 내 경험을 생각해 보았을때 이는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학내자치활동이라던가, 아무 생각없이 노는 것 같아 보이는 술자리나 MT에서조차도 다른 사람과 지내는 법이라던가, 즐겁게 노는 법과 같은 인생에 꼭 필요한 것들을 배울 수 있었고, 수업이라는 단힌 공간 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과 묵직한 사유를 마주할 자유와 기회는 대학생활에 있어서 빼 놓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허나 이 말은 이처럼 강의시간 외에도 배울 수 있는 삶의 지혜가 많으니 이를 놓치지 말라는 충고이지, 결코 강의를 소흘히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강의실 안에서는 죽은 지식 외에 배울 게 없다고 뛰쳐나가던 옛 열혈투사들이 왜 배움을 찾아 도로 학교로 들어오는 것인가.

나는 강의실은 여러가지 교양과 전공지식 이전에, 근본적으로는 '겸손함'을 배우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입학 이전 각 고등학교의 불사조들조차 다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공간이며, 설령 낡은 책들에 담긴 내용을 죽은지식이라 부르며 고민하는 순간에도 우리들은 층층히 쌓여 온 낡은 지식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다. 역사 앞에 고개를 숙이며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덕목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며, 지성인이 되고자 한다면 대학생활동안 꼭 배워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기에 나는 주변의 지인들이 대학에 입학하면, 바로 위와 같은 보충 설명을 꼭 첨부해서 말해준다. 대학생활 중 강의실에서 얻어가는 건 30%정도라고.

강의석 군의 최근 논란이 된 글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안타까움이 들었던 이유는 바로 그가 강의시간에 별로 공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글에서 너무나 티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2004년, 그가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학교를 상대로 싸움을 걸었을 때 그를 지지했었다. 그 때부터 유난히 말이 많았던 언론플레이는 정치나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재능이고, 중요한 것은 언론플레이 자체기 아니라 그에 걸맞는 실천이다. 서울대 법대에 수시모집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입시를 위해 단식을 한 것이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한끼 굶어도 배고픔에 몸부림치는 범인으로서는, 그러한 생을 건 투쟁의 진정성은 함부로 모욕할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최근에 쓴 그 글에서는 그러한 진정성과 지능적 행보를 발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강의석 글의 논리적 모순은 간단하게 넘어가고자 한다.(자세히 보고 싶으면 이 포스팅을 참조하세요 병역면제와 강의석)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병역을 면제해주는 제도는 역으로 병역이 남성들의 삶에 커다란 짐임을 국가 스스로 시인하는 것임에 다름없으나, 강의석은 이 문제의 책임을 오히려 메달리스트 개개인에게 돌리는 우를 범했다. '나와 같이 양심적 병역거부에 동참하라, 아니면 군대가라'는 논지는 지극히 독선적인데다, 더욱이 그 근거가 '당신만큼 훌륭한 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할 것이다'라면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도리어 욕되이 하는 것이다.

강의석 군에게 단순히 논지의 조악함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얻을 수 있는 권력의 정당성이다. 그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화제의 중심에 섰던 바 있던 '유명인'이며, 현재는 서울대 법대생이라는 타이틀마저 달고 있다. 그가 한사코 부정해도 그가 젊은 나이에 쌓아온 이러한 이력들이 그의 활동에 따라다니는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다. 대학내일에 실린 일개 대학생의 글이 이토록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 역시 글쓴이가 '강의석'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언론플레이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세간에 분분한 유명세도, 또한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자 하는 욕망도 어느 활용하기 나름이며 그 자체로 비판을 받아야 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설득력을 '철저한 자료조사와 치밀한 논리를 세우기 위한 노력' 대신 이와 같은 유명세와 학력자본에 기대면서 오피니언 리더가 되고자 한다면, 학력사회의 정점에서 얻은 권력을 벌써부터 멋대로 휘두르고 있다고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조금 억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강의석은 남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하고, 보다 더 설득력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는 현재의 시점에서 그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이들과 견주어보면 가만히 있어도 더 많은 것들을 손쉽게 가져갈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는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분명한 방향성과 운동목적 갖고 대학내일이란 공적 공간에 글을 썼다. 그러나 글 자체에 담긴 고민의 깊이와 논리의 섬세함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그의 운동은 이미 주어진 유명세와 학력자본의 힘으로 권력을 쟁취하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행위 그 이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기득권에 도전하겠다면서 그 기득권의 일부가 되어 이에 의지해 살기에는 23살이면 너무 젊다. 인정받고 싶다면 그 누구도 유명세와 학력을 들먹일 수 없는, 그런 땀의 흔적이 엿보이는 글을 써야 한다. 당신에게 새삼 대학생활의 그 30%는 현재로서는 무엇보다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 이 글은 대학내일에도 투고한 글입니다. 
* 글 자체가 한 개인에 대해 수없이 쏟아지는 불균등한 논쟁의 일부가 될 수 밖에 없기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강의석 개인에게 개인으로서 거는 문제제기인만큼 개인에 대한 거친 비방댓글은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 강의석 뿐만이 아닙니다. 방송에 나왔던 공신(공부의신ㅡㅡ;;)이라던가, 상당부분 언론을 타는 서울대생들에게 쉽게 볼 수 있는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진정 공부를 한다면, 언젠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날이 오겠죠.

by 은하 | 2008/09/08 04:48 | 생각 | 트랙백 | 덧글(35)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경제의 탈정치화를 옹호하는 이런 주장이 가진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어디서 경제가 끝나야 하고, 어디가 정치가 시작되어야 하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있다. 그러나 (경제의 영역에 속하는) 시장은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다. 시장을 지탱하는 모든 소유권과 기타 권리들은 정치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점에서 시장 역시 정치의 산물인 것이다. 경제적 권리는 정치적 기원을 갖는다.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경제적 권리들이 과거에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런 사례들중에는 아이디어를 소유할 권리, 그리고 어린 나이에는 일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된다. 이런 권리들이 정치적인 논쟁의 대상이었을 당시에는, 이것을 존중하는 것이 왜 자유 시장과 양립할 수 없는가 하는 무수한 '경제적'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경제를 탈정치화해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경제와 정치의 구분선이 옳다는 가정이 있는데, 그러나 여기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270쪽)

 

제가 워싱턴에 가져간 것이 그 목소리들입니다. 그 곳에서 제가 처음으로 발의한 법안은 대학 학비를 좀 더 감당할 만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곳에서 가정들이 빚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하는 파산법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저는 현 세대에서 가장 로비를 몰아내는 개혁(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개혁은 로비스트들이 미국 시민들에게 그들이 누구에게서 돈을 모금하고, 의회의 누구에게 그 돈을 보내는지를 말하도록(tell) 하는 것이었습니다.

(버락 오바마, 2008. 02. 13. 제너럴 모터스 연설, 출처:
테라포밍의 이글루)


변화와 희망을 주된 모토로 하는 오바마는 그 실현수단으로 의료보험, 교육, 에너지 분야의 개혁을 내걸고 있다. 그러나 오바마에게 미국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을 묻는다면 그는 워싱턴의 정치구조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옥같은 명문으로 심금을 울리기로 유명한 그의 연설문은, 때때로 그러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부각되지 않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바마는 매 연설마다 로비스트에게 좌지우지되는 워싱턴 정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숨기지 않으며, 여기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비롯되었다는 신념을 끊임없이 역설한다는 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로비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대의성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는 점이다. 의사소통과 여론형성과정을 무력화시키고, 거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로비능력을 지닌 소수에게 사실상의 권력을 집중시킨다. 스스로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대원칙이 희석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바마 진영에서 경선기간부터 로비스트들의 후원금은 받지 않기로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소수에 의한 정치지배를 고쳐내지 못한다면 공익과 약자를 위한 그 어떤 정책도 실현화 될 것이라는 확신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장집이 정당정치의 제도화를 그토록 강조한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에서는 로비정치가 대의성을 왜곡시킨다면, 한국에서는 실제 우리 사회의 갈등의 구조와 여론을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독점적 정치구조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반면 이러한 구조의 반작용으로 일상화된 시민여론이 직접적으로 폭발하는 현상은, 그 폭발력에 비해 미미한 제도적 실천성으로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와 반감을 키우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폭발적인 시민의 힘이 아니라 (이것이 불필요해서가 아니라,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시민사회의 다양한 갈등과 목소리가 실질적이고도 지속적인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과 실천의 장이다.

문제는 언제나 정치였다. 지난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교육이 정치판에 물들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며, 그 결과가 전교조가 미는 후보를 떨어뜨려야 한다는 판단으로 귀결된 것은, 정치는 애초에 글러먹었으니 정치바깥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성공적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뿌리박힌 탓이다. 특히나 정치의 대안으로 경제계에 기대는 심리는 한 시대를 풍미한 CEO 지도자론을 거쳐, 스스로 화식열전의 인물임을 자임하는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이 정부는 정치는 경제회생을 선도하는 기업을 철저하게 후원해주는 서포터즈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 전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한 노무현 정부가 있었으니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배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끝없는 정치부정 끝에 '정치를 부정하는 정치세력'이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는 아직도 문제다.

정치가 문제인 까닭은 정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아주 간단한 비유만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구슬은 꿰기 나름에 따라 목걸이도, 귀고리도, 팔찌도 될 수 있다. 목걸이를 만들 것인지, 귀고리를 만들 것인지 미리 상을 잡아놔야 이에 걸맞는 훌륭한 구슬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보배를 만드는 건은 구슬업자들에게 넘어갔다고 불평을 터뜨리는 곳에서, 목걸이만한 팔찌가 나오고, 짝이 안 맞는 귀고리가 생겨나는 것은 이상스러운 일이 아니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의 이전 발언에 분노했던 것은 스스로 정치의 임무를 방기했기 때문이다.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규정해버리는 것 자체가 정치다. 장하준이 지적한대로 지적소유권 및 아동노동에 관한 논쟁처럼 어떤 시장을 만들 것인지가 철자한 정치적 논쟁을 통해 결정된다. 대통령이 할 일은 바로 여기에 집중하는 일이지, 앞장서서 시장을 초권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규제도 풀어놨는데 재계가 투자를 안 한다"는 불평이라니!

정치가 문제라는 의미는 지금의 정치권이 경제를 성공한 기업인의 무림쟁패극으로 인식하여, 그 안팎의 수많은 경제주체들의 삶과 눈물을 완벽히 지워버린 얄팍하고도 천박한 인식을 지녔음을 말한다. "미국의 경제력이란 포춘지에 랭크되어 있는 상위 500개 기업의 수익률이 아니라, 한 개인의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시장에서 기회를 얻을 수 있는지 여부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웨이트리스가 아픈 아이를 위해 휴가를 내어도 해고당할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가에 달렸다"는 오바마의 대선후보 수락연설의 한 대목이 진짜 정치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정치계에서 로비스트를 몰아내야 하는 까닭은 이 웨이트리스와 아이디어 외에 가진 것 없는 무명씨의 의지가 정치에 반영되는 것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정치가 문제라는 것은 정치에서의 작은 결정이 세상의 많은 부분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쯤에서 우리의 출발선은 명확해진다.

IMF 이후 10년도 더 지났건만, 해마다 경제가 이슈가 아닌 적이 없었다. 경제살리기 담론은 지나칠정도로 쏟아져나오는데, 정작 어떤 경제여야 하는지는 논의된 바가 없다.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가 아니고 정치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게끔 만들어버리는 정치구조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권이 해야할 일이 대기업 후원이라고 믿음이 상식이 되어버린 정치철학이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원하게 일갈할 수 있어야 한다. MB 이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 아마 현 정권이 이를 전혀 모르고 있을테니 이는 비극이다만, 그보다 더 큰 비극은 시민사회에 만연한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끝없는 환멸과 증오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를 포기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심판할 때, 정치는 결코 심판받지 않는다. 정치야말로 우리가 살아갈 세계를 함께 설계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by 은하 | 2008/09/06 06:23 | 우리시대 | 트랙백(2) | 덧글(22)

불심, 그 이상으로 대동단결

불심으로 대동단결

2002년 대선 때 이 캐치프레이즈를 보았을 때, 어이없으면서도 웃겼던 게 기억에 난다. 종교지도자를 뽑는 행사도 아니거니와, 삼국시대 제왕들이나 할 법한 말을 21세기 대통령 선거에 나와서 하고 있다니. 그러면서도 포스터의 김길수 씨 이분은 묘하게 사이비적 카리스마가 있으셔서, 어째 출마의 목적이 TV사극 태조왕건의 궁예 코스프레가 아니었나 추측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선기간에 기말고사를 봐야하는 현실에 몸부림쳤던 나에게, 한가닥 웃음을 선사했던 말이었는데. 지금은 이 말이 정말로 실현되려고 하고 있다.

27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범불교대회에는 무려 20만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이토록 뿔난 불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불교계는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정책에 대해 따가운 비판을 쏟아내고 있으며, 대통령의 사과 및 '종교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고 있다. 장기전끝에 촛불을 거의 진압하고 강세모드로 돌아서려던 정부 입장에서는 다크호스를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차별정책보다 더 근본적인 '공직자'로서의 자각 문제

다크호스를 넘어서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정권이 얼마나 이 사태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느냐에 달려있다. 불교계의 분노는 단순히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를 차별하지 않는 것은 상식이자 대원칙인데, 이를 별도로 법으로서 제정한다는 것은 오히려 대원칙의 품격을 깎아먹는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문제는 정부의 처신에 있어 단순히 '차별'이라 표현할 수 없는 더욱 중대한 결점이 치명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교계에서 주장한 불교차별정책의 예로는 다음과 같다.(프레시안: 관련기사) 그러나 차별정책이라 불러도 좋을지는 의문이다. 사안들을 면밀히 따져보면, 대체로는 종교와 관련된 구체적 정책이라기보다는, '개념없는 기독교 신자들의 삽질' 쪽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경기여고 사태와 같은 경우는 단군상 목이 잘려나간 사건마냥 이전 정권에서도 일부 몰지각한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자행되고는 했다.

그런 이 분노가 기독교계가 아닌 대통령에게 쏟아지고 있다. 즉 지금 불교계의 눈에, 그리고 이를 지지하는 다수 시민들의 눈에는 대통령과 주요 공직자들이 '개념없는 기독교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이번 정권의 치명타다. 공직자 이명박과 인간 이명박은 분리되어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국민들의 눈에는 공직자는 간데없고 기독교 신자인 인간 이명박만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공직자들이, 사적인 존재로 공직에 임해왔다는 것이 '종교'라는 뇌관을 통해서 드러나버린 셈이다.

취임 7개월째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는 MB 정부의 핵심적 문제가 바로 이거다. 공직자 스스로가 공공의 마인드로 공직에 임하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 주식회사 CEO 이명박론에서 보이듯, 사적이익집단의 대변자와 같은 역할만을 했다는 것이다. 그 동안 숱하게 들어왔겠지만, 대통령은 사장이 아니다. 하는 정책마다 줄줄이 국민의 대에 부딛치는 것은 하는 정책마다 공은 없고 사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문제를 "불교대우 왜 안 해줘!"하고 삐진 것을 달래려는 차원에서 수습하고자 하면 곤란하다. 대통령이 기독교도인 것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기독교도로서 대통령직을 수행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에 정작 예수의 가르침인 사랑과 봉사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리고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기독교도에만 국한시키면 영원히 답은 없다. "기독교도로서" 와 마찬가지로 강부자, 건설업, 대기업 등의 대변자로서의 자신에 대해, 돌이켜보아야 할 때이다.

민중불교가 되살아날 수 있을까?

사실 2002년 불심으로 대동단결이 웃겼던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승려가 대선에 출마했다는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이전에 목사도 대선에 출마한 적 있지만 그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분노도 아닌 언밸런스에서 유발하는 웃음이라니. 어쩌면 불교계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걸어온 길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무소유와 청빈의 사상을 강조하는 불교이니만큼 권력과 거리를 두는 모습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중생의 생생한 삶과 거리가 멀다는 반증 아니었을까.

불교계 입장에서는 위기이자 기회다. 최근에는 천성산 지율스님의 단식이나 새만금과 같이 생명,환경 분야에서 현실에 참여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불교가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적극적인 사회적 역할을 해 낸다면 불교의 사회적 위상으로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더욱이 불교도 신자들은 지방의 고령자들 가운데 많이 몰려있다. 불교의 사회적 역할이 더 절실한 이유다.
 
현재 기독교가 많은 욕을 먹고 있지만, 기독교 전체의 문제가 아니듯이, MB에 반대한다고 해서 불교 전체를 그 대척점에 세워두려는 것은 아니다. 허나 가뜩이나 살기 어려워지는 세상이라면 어느 종교이든 이들의 삶의 짐을 덜어주고, 앞길을 밝혀주는 참 스승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다음은 수경스님의 성명 전문이에요 :)



이어지는 내용

by 은하 | 2008/08/28 10:50 | 우리시대 | 트랙백 | 덧글(11)

회손녀 사건은 과연 마녀사냥인가

회손녀 단상.

베이징 올림픽이 한창이던 와중, 인터넷은 '회손녀 사건'으로 떠들썩해진 적이 있었다. 유도 은메달리스트 왕기춘 선수의 미니홈피에 달린 악플을 보고 네티즌들의 작성자의 싸이를 찾아가 항의했는데, 오히려 이들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하며 심지어 여자에게 창녀라 욕하는 것과 같은 뉘앙스로 '위안부' 운운하는 폭언을 터뜨려, 네티즌들과 그녀 간의 대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회손녀라는 이름은 싸움 와중에 그녀가 네티즌들을 명예'회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생긴 별명이다.

결과는 회손녀의 완패다. 자신의 미니홈피가 털린 것은 물론, 그녀의 개인정보가 유출되면서 그녀가 다니는 학교 홈페이지마저 공격으로 다운된 것이다. 사진 및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뿌려진 것은 두말할 나위없는 일이다. (이 와중 아프리카 TV가 중계하는 가운데, 회손녀와 네티즌들의 PC방 현피도 추진되기도 했다. 물론 실현되지 못했지만-_-) 더욱이 이 때문에 수강신청을 해야 하는 그 학교 학생들까지 피해를 보기에 이르렀다, 회손녀는 결국 사과문을 올리게 되기까지 했지만, 학교에서는 그녀를 징계할 방침이라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중평은 물론 회손녀의 잘못이 애초에 발단이 되었지만, 그녀를 떼로 단죄하는 네티즌들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이다. 논쟁 과정에서 회손녀의 욕설은 차마 입에 담았다가는 내 입이 더러워질 거 같아 말을 못하는 욕설이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이 모든 것은 회손녀와 왕기춘 선수 개인 간의 일이고, 제 3자가 나설 일이 아니며, 특히나 남의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함부로 유포시키는 행위 역시 범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개똥녀 사건이나 아프간 피랍사태 때 익히 본 바 있는 인터넷 마녀사냥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파시즘적 사고방식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회손녀 사건은 앞선 사건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이 해프닝을 파시즘의 전조로 보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우선 개똥녀사건은 인터넷 바깥에서 벌어진 일이 인터넷 공격으로 이어진 일이었지만, 회손녀사건은 철저히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진 일이다. 따라서 회손녀 사건에서 인터넷은 단순히 집단의 분노를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애초에 문제 자체가 인터넷 속에서 생성되고 존재한다. 따라서 이 문제를 규정하고 해석할때 인터넷 룰을 적용시키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두번째 차이점을 지적할 수 있다. 회손녀 사건은 단순히 왕기춘 선수와 회손녀 간의 사적 문제가 아니다. 여럿이 방문하는 인터넷게시판은 미니홈피와 같은 사적영역이라도 반쯤은 공적공간일 수 밖에 없으며, 인터넷에서 특정대상을 향한 언어폭력 역시 만인이 눈뜨고 지켜봐야 한다는 점에서 만인에 대한 폭력이 되고 만다. 나에게 하는 욕이 아니라도 길가다 쌍스러운 욕이 들리면 기분이 나쁘기 마련인데, 인터넷에서 멋대로 배설해놓은 욕은 항시 그 공간에 남아있어 다른 사람에게도 불쾌감을 주는 것이다. 특히 회손녀의 욕설은 같은 인터넷 방송 시절 김구라 이상으로 여성에게도 상당한 모욕감을 주기에, 명예훼손이라 하자면 이를 우연히도 보게된 다른 네티즌들이라고 할 말은 있다. (그 여자는 자기도 여성인 주제에 왕기춘 선수를 욕할 때에도 꼭 '년'이라 하더라...)

싸이월드 방명록에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홈피를 노출시키고 낯선 이들이 여기에 찾아오는 것도 감내하겠다는 이 세계(인터넷전체가 아니다. 실명제인 싸이월드 말이다)만의 룰을 암묵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개개인은 자신이 책임질 만한 수준에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이며, 그게 싫으면 쓰라고 만들어진 게 비밀이야다. 물론 1촌 아니면 못 비밀이야는 안 되지만, 애초에 화를 불러올 거 같은 글이면 쓰지 말거나, 그 화를 감당하거나 네 알아서 하라는 것이 바로 이 시스템의 핵심이다. 그런데서 생판 남인 왕기춘 선수 싸이에 가서 악플을 도배질했으면, 자기 싸이에 항의방문이 이어지리라는 것은 본인도 알고 한 행위나 다름없다.

앞서 말한대로, 회손녀의 욕설을 보고 분노와 수치심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네티즌들이 항의방문을 했고, 이에 회손녀는 더 심한 욕설을 자행함으로써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해도 이는 결국 쌍방의 합의 하에 일어난 그들만의 룰을 적용해야 하는 게임이라 생각한다. 일부러 싸이월드에서 실명으로 악플을 늘어놓아 항의방문객을 늘리면서 자신의 싸이 조회수를 늘리고 싶어하는 이상한 사람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이러한 세계이기에 또한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섭다는 룰도 나오는 것이다. 여하간에 이는 바로 그러한 룰을 적용한 게임. 수많은 네티즌들을 낚은 낚시왕이 되느냐, 인해전술에 털리고야 마느냐. 애초에 그 판을 깔아놓고 명예'회손'이니 운운하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며, 이를 보며 파시즘을 우려하는 것은 너무도 낯간지러운 해석이 아닐까 싶다. Why so serious? 이건 그냥 찌질이들의 게임이다. 회손녀는 자기가 벌린 판에서 졌을 뿐이다.

하지만 난 이 사건에도 serious한 부분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회손녀가 일말의 동정을 받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네티즌들의 행동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를 양비론적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고, 네티즌들의 광기에 우려를 표하고 싶지도 않다. 문제는 회손녀 사건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이다. 인터넷 세상에서는 단 한명이 지껄인 언어폭력일지라도 이를 본 불특정다수에게 모두 해악을 끼치지만, 가해자는 결코 제재당하지 않는다. (알다시피 대부분 포털의 신고기능은 상당히 늑장대책에다 부실하기까지 하다) 에이 그냥 똥밟았네 하는 심정으로 가야만 하는 지나가는 사람이 참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이러한 경험은 인터넷 세계에서 정의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철저하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세상에서 '윤리'와 '도덕'의 호소력은 한없이 우습기만 하다. 회손녀에게 말린 우리의 찌질한 네티즌에게 근엄한 비판을 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손녀사건은 개똥녀사건보다는 인터넷의 무수한 악플들과 더 닮았다. 어떤 녀석이 '절라디언' 운운하며 씨부려놓고, '한국여자'운운하면서 갈겨놓는 상황에서 결코 '어차피 찌질이들의 악플이기 때문에 그냥 비웃고 넘어가라'며 감정이 상하는 것 자체를 막을수는 없다. 권력관계의 약자들을 그대로 후벼파는 비열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넘어가자니 억울하고 괘씸하고, 응대하자니 찌질해지는 이 룰이 적용되는 세계에서, 기꺼이 찌질해지는 용자들을 보면 가끔은 시원한 것도 어쩔 수 없다.

포르노 광고도 얼핏 비슷하다. 다음 세계엔 게시판에서 아가들 사진이나 볼까~하다가 확 떠버리는 포르노 광고에 화가 치미는 것은 나 뿐이 아닐테지만, 결국 손해보는 건 우리들이다. 포르노 광고를 올린 사람은 그 어떤 처벌도, 제재도 당하지 않는다. 거의 살포되다시피하는 포르노광고가 공익적 해를 미치는 게 명백한데, 이 또한 공식적으로 아무런 제재방법이 없다. 개인의 인격을 수양하거나. 만약 걸린다면 다구리 하거나.

인터넷은 경찰없이 개개인들이 문단속 잘하는 것 외에 답이 없는 범죄도시같다는 느낌이다. 이런 경우 흔히 좀도둑이 걸리면 동네주민 전체에게 흠씬 두들겨맞기 마련. 다구리 문화는 찌질하지만, 정의를 실현할 공식적 장치가 없으면 결국 내가 곧 정의다로 시작되는 다구리문화가 나올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여기서 다구리는 어떤 면에선 피해자들의 최후 수단이기도 하다. 이 현기증나는 인터넷 공간에서 어떻게 가치를 합의하고 실질적으로 개개인의 '보기 싫은 걸 보지 않을 권리', '뜻하지 않게 모욕당하지 않을 권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이 환경에서 도덕과 윤리로 다구리를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무력하다.

오늘도 게시판 하나 무심코 클릭했다가, 제목과 달리 아주 엽기적이고 기분나쁜 사진 하나가 제대로 안구를 할퀴고 지나갔다. 어설픈 악플보단 무플이 미덕이라 아무짓도 안 하지만, 누가 이 새끼 밟아서 떡이 되도록 다져놓는 쪽이 더 시원하긴 할텐데 말이다. 애초에 보지 않을 권리가 없다면 사후복수의 권리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전자가 실현되지 않으면 사람의 심리란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거 같다.

by 은하 | 2008/08/28 09:37 | 생각 | 트랙백(3) | 핑백(1) | 덧글(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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